절차탁마 S

1학기 10주차 후기

작성자
이진아
작성일
2021-04-29 18:59
조회
168

규문 2021 절차탁마 스피노자와 친구들 1학기 10주차  (4월 21일) 수업 후기


규문에 입학해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벌써 10주차. 1학기가 끝났다.  스피노자는 앞으로 3학기 내내 계속 만나겠지만, 라이프니츠와는 헤어질 시간이란다. 이제 겨우 아주 조금 알게 되고 정들기 시작했는데...

사실 신입생인 내게 스피노자는 제1외국어요, 라이프니츠는 제2외국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수업을 들을 때와 책을 읽을 때는, 이 개념 저 개념이 스피노자인지 라이프니츠인지 뒤섞여 당최 구별이 안 가던 시간이 10주 중 절반이 넘었던 것 같다. 스피노자 3년차인 선배 학인들이 유창하게 스피노자의 언어를 라이프니츠의 언어와 섞어 능숙히 구사할 때, 나는 그저 나의 모국어가 도통 이해 되지 않고 그저 언젠가 내게도 이 난해한 언어들이 이해될 날이 올까 의문하며 두 눈만 껌벅거리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텍스트를 읽어도 도무지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학기 중반을 향해 가면서는, 신기하게도 점차 단어가 들리고, 그 다음엔 구절이, 그리고 중반을 넘기니 문장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토론 시간에 몹시 어눌하지만 발언도 해본다. 읽고 글쓰기하고 토론하는 자기주도학습 방식의 효과인 걸까? 처음엔 어렵고 시간이 좀 더 걸릴 수 있지만 길게 보면 독립적이고 자립적 학습 능력을 키워 주는 것 같다. 여하튼 이렇게 아주 오랜 만에 외국어 학습 단계를 실감나게 밟아가고 있던 중인데, 어느 덧 1학기 종강이다.

10주차 1교시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강독 시간. 윤리학 텍스트의 2부 정리 20부터 정리 36까지 다뤘다. 여느 때와 같이, 세미나 튜터 정수샘의 리드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일정 분량을 소리 내어 읽은 다음, 이해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 질문을 하고 함께 토론을 했다. 신입 학인들이 선배 학인들에게 질문을 하고 가이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번 범위의 경우, 정리들은 차라리 간단 명료한데, 증명으로 가면 되려 복잡하고 여간 난해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날 질문과 토론 시간에는 에티카의 정리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하는 한에서만”이라는 접속사구에 주목하기도 했다. 이 접속사구는 해당 명제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를 제한한다는 것.  한 예로, 정리 23은 “정신은 신체의 변용들의 관념들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이다. 즉, 인간의 정신은, 신체 변용에 대한 관념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다. 이이서, 인간 신체 변용에 대한 관념과 신체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에는 인간 정신에 대한 것이든, 외부 물체에 대한 것이든,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등등, 내게는 여전히 난해하지만 뭉뚱그려 요약해보면, 인간 정신은 인식이든, 관념이든, 지각이든, 적합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로지 신과 관련되는 한에서 만이 모든 관념이 참이라고(2부 정리 32) 한다. 이런 인간 정신의 한계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다가왔다. 인간 정신 중 하나인 나의 정신을 떠올리니, 다른 사례를 찾아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2교시에서는 9 주차에서 채운선생님이 내주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개념(능동과 수동; 자유 역량; 윤리적 삶) 정리 과제와, 2학기 에세이 개요를 돌아가며 발표하고 코멘트를 공유했다.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와 ‘최선의 세계’에 관련해서, 정수샘이 언급하신 영화 “밀양” 후반부에 나오는, 전도연이 아이의 가해자를 찾아가 직면하는 장면을 소재로 흥미진진한 토론도 했다.

3교시는 글쓰기 튜터이신 채운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먼저 학인들의 2학기 에세이 개요에 대한 채운샘의 코멘트를 들었다.  선생님께서 내게 “예술가는 보는 것을 보고 그 것이 자기에게 이렇게 변용했다라고 그것을 규정하는 순간, 예술을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씀하시는데 갑자기 꽝 하고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헛것에 매달려 있었다는 걸 단번에 보시고 눈 뜨라고 하신 그 말씀에 울컥했다. 감사하게도 화두를 받았다.

이어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대한 1학기 종강 강의 시간. 라이프니츠와 작별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마음 한 켠 서운했다.

채운선생님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그리고 바디 (신체, 물체)에 대한 유기체적인 사유 방식을 들뢰즈의 철학을 통해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그 설명을 위해 생물학적 근거와, 건축학적 관점을 결합시켜 접근했다.  또한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와 ‘최선의 세계’를 2교시 토론에서 공유한 것과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해주셨고, 그 개념들과 연결되는 삶의 윤리의 문제, 사물을 독립된 규정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어떤 것이 아닌 사건으로서 사유한다는 것, 인간의 자유, 라이프니츠의 철학의 핵심인 ‘발생’적 사유 등등, 라이프니츠의 중요한 핵심 개념들을 스피노자와도 연결하여 풀어내 주셨다. 채운선생님께서는 1학기에 공부한 라이프니츠 철학은 스피노자를 좀더 풍부하게 읽기 위해 맛을 보는 정도로 다룬 것이지만, 모나드론은 매우 복잡하게 논의 되어온 개념으로, 나중에 다시 다뤄 볼 것을 기약하시며 1시간 45분의 밀도 높은, 감명 깊은 강의를 마무리하셨다.

이 날 채운샘께서는 예외적으로 줌 화상회의 서비스를 통해 우리에게 강의를 해주셨는데,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은 이 날 0과 1의 조합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시청각 정보라는 ‘현상’으로, 스피노자의 관점으로 보면 2차원 평면 모니터 속 가상 현실로 변용된 양태로서 우리와 만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학기 라이프니츠 공부는 어렵기는 해도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무언가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익숙한 불교 개념들에 내 맘대로 대입해보니 어쩐지 잘 통해서 그랬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라이프니츠는 물체를, 데카르트가 말하는 연장적 실체로 보지 않고 현상으로 보았는데, 이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공, 무상과 연결되는 것 아닐까. 이 날 채운샘의 강의에서 라이프니츠가 ‘신체적 관계’라는 표현으로 연결, 관계, 결속에 의한 실현으로서의 바디(물체, 신체)라 말씀하셨는데, 이 지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진다고 보는 연기緣起가 떠올랐다. 라이프니츠의 ‘미세한 지각’과 연결해 들뢰즈가 말한 영혼의 ‘성향’은 습, 업식, 까르마와 통하는 건 아닐지. 그래서인지 몰라도 라이프니츠는 처음 만났을 때는 생판 모르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디서 만난 적 있는,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다. 작별하는 마당에, 앞에 있다면 이렇게 물어봤을 지도 모를 일이다. “라이프니츠씨, 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여하튼, 내게 절차탁마 S 1 학기 수업은 당혹감으로 출발해서 철포자(철학포기자)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무사히 1학기를 마치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공부의 찐한 고통과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한 것은 덤으로 받은 것 같다. 온라인을 병행해 수업을 열어주셔서 코로나 와중에도 격주로 제주에서도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배려해주시고 이해해주신 튜터선생님들과 학인샘들께도 감사하다.

이상 소감문 끝.

<1학기 10주차 채운선생님 라이프니츠 종강 강의 핵심 발췌 (또는 요약) 정리>

l  라이프니츠의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은 그의 후기 저작과 편지들에 들어있다. 들뢰즈도 라이프니츠에 관한 후기 저서인 <주름>에서 라이프니츠를 일의성의 철학자로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다.  <주름>은, 한 철학자에 관해 글을 쓸 때 자신이 연구한 철학자를 경이로운 방식으로 승화시키는 들뢰즈의 탁월함을 보여주는데, 더불어 타인으로부터 사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훔쳐내는’ 그의 방식은 대단히 놀랍다.

l  라이프니츠는 대단히 생물학적 차원에서 신체, 바디를 보았다.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의  물질에 대한 연장적 사고를 비판했는데, 연장이라는 건 계속 분할 가능하고 아무리 작게 쪼개도 그건 연장이다.

l   DNA는 나선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체에게 있는 모든 유전자 정보의 합, 게놈은 정보다. 인간의 유전자 정보가 원자처럼 연장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 DNA그림을 보면 나선형으로 돌돌 말려 있는데.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DNA의 유전 정보들이 “접힌다”는 표현을 쓴다.

l  라이프니츠가 유기체를 사유한 방식이 독특하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연장으로서 바디를 사유한 게 아니라, 오히려 유기체의 관점에서 몸의 문제를 사유한다. DNA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이런 몸을 가지고 환경과 이렇게 저렇게 작용한다는 그 자체가, 사실은 정보들이 계속 이 외부적인 것을 접어 놓고 그것을 펼치는 과정이다. 그것을 DNA표현형이라고 부른다.

l   생명학하고 같이 보면 라이프니츠가 훨씬 더 이해되는 면이 있다. 인간이 오랑우탄과, 포유류 동물과 정보, 즉 DNA유전자가 큰 차이가 나는 게 아니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그 때문에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드러나는 방식(표현형)이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몸이라는 것을 대단히 연장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물질을 그렇게 생각하는 한 여전히 우리는 이원론인 거다. 일원론이 되려면 단순히 두개가 하나가 아니라 물질 자체를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l  스피노자 또한 우리 몸이 연장적인 실체라는 생각을 깬다. 우리가 스피노자식으로 봐도 나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나의 표상이다. 세포, 피에 있는 림프, 내 몸에 살고 있는 기생충 등 내 몸을 구성하는 것들이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몸이라고 하는 걸 구성해내는 것.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몸은 연장적 실체가 아닌, 매번 조성의 결과인 거다.

l   연장으로서 몸을 바라보는 사고를 내가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중요하다. 몸이 없다는 게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에는 모나드가 있다고 했다. 모나드라는 건 우리 식으로 말 하면 일종의 정보 같은 거다. 그것이 외부에 따라서 변화하기는 하지만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펼쳐질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이미 다 들어있다.

l   지각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저 밑바닥에 미세한 지각이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가 이것을2층 건물에 비유해서 미세한 지각은 1층에, 가장 이성적인 모나드는 2층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2개 층이 결국 하나의 건물을 구성한다.

l  라이프니츠는 신체적 관계라고 말하는데, 관계, 관계라는 게 연결짓기 또는 결속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과 저것을 묶는 관계다. 모나드라는 단순한 실체들을 이렇게 묶는 관계들이 있다는 거다.  그걸 들뢰즈는 미세한 것들은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잠재적인 것들을 그런 관계들, 결속에 의해서 실현시켜내는 과정들이 존재한다. 바디라는 건 그것들이 실현된 것이라는 거다.

l  스피노자는 이 연장과 사유를 두개의 속성으로 보고 그걸 둘 다 신의 표현으로 본 거다. 그러니까 신은 자기를 연장 속성으로도 표현하고. 그러니까 이걸 실체가 아니라 속성으로만 본다는 자체가 스피노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거다. 물질이라는게 따로 주어져 있지 않다는 거다. 다만 표현이 될 때 연장적으로 표현이 되는 것. 정신적으로 표현되는 것, 표현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l  라이프니츠는 약간 다르다. 이걸 좀 뒤집어 가지고, 모든 모나드들이 자신의 의식 속에서 요청하게 되는 어떤 결합된 것들 이런 거다. 그러니까 그 모나드들의 복합체라는 건, 저 미세한 지각의 수준에서는 구분이 안되는데 그것들이 복합된 것들에 대해서 우리의 의식의 수준에서는 어떤 것이 어떤 형태로 이렇게 신체화가 된다는 거다. 들뢰즈는 그걸 자기의 개념을 통해서 일관되게 어떻게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가 이런 개념으로 설명을 한다.

l  유기체의 차원은 계속 자기 안에 이 세계를 집어넣고 그 집어넣어진 것을 펼쳐내는 끊임없는 역동적 과정 속에 있는 게 유기체라는 것이고 이게 모나드의 운동인 거다.

l  개념은 라이프니츠는 사물이라는 개념 대신에 사건의 개념을 사유하고자 했다.

l  .사물은 인간이 이용하기를 기다리는 맥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한 하나의 표현인 거댜. 돌덩어리에도 모나드가 있다고 했다. 물론 영혼 이성은 없지만, 모나드는 있다.

l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보고자 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발생을 사고했다는 것이다.

l  열등한 모나드들이 웅성웅성하는 그 미세한 차원의 지각으로부터 인간이 명석하고 판명하게 뭔가 의식적으로 지각한다는 것, 여기에 대단히 윤리적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 그러면, 라이프니츠가 관심있었던 건, 그럼 왜 아담이 죄를 짓지 않는 세계로 갈 수 있었는데, 신의 머릿 속에 다 있었으니까, 왜 죄를 짓는 세계로 갔지?

l   선에 의해서 우리의 세계가 지배되기 때문에, 신의 의도한 선에 의해서 세계가 지배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이것을 선택하지만 또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그 가능성 속에서, 열린 가능성 속에서 이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모든 문제의 순간에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산출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고 얘기한다는 거다.

l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성향이라는 것. 영혼 안에 어떤 것들이 주름이 접혀 있고 어떤 방식으로 변곡점이 어디어디 형성되어 있느냐, 이것을 성향이라고 얘기한다.

l  이것이 동기다. 우리가 왜 어떤 곳으로 향하고 어떤 것으로 향하지 않는가. 동기는 우리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자기에게 있다는 것, 주체에 있다는 것.

l  라이프니츠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현실화 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무언가를 현실화시킬 것이냐. 무얼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이냐 하는 이 가능성이 우리에게 다 내재되어 있다. 과거를 우리는 다 함축하고 있고 미래를 모두가 잉태하고 있다는 것.
전체 1

  • 2021-04-29 19:31
    1학기 동안 신고식 제대로 치르셨군요. ㅋㅋㅋㅋ 저에게도 스피노자는 여전히 몸에 잘 붙지 않는 외국어인데요. 확실히 말을 하는 만큼 조금씩 친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이제 좀 친해질까 하다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리고 이번에는 들뢰즈로부터 역시 감명을 받고 말았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훔쳐내는 들뢰즈의 사유가 매우 세련되고, 섹시하게 느껴집니다! 크으... 이래서 들뢰즈 읽기를 멈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들뢰즈에 빠지는 만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에게도 매력을 느끼게 되고요. 일종의 '단장취의' 같은 느낌이네요. 아, 왜 '단장취의'가 텍스트에 대한 고도로 세련된 존경심의 표현인지 알 것 같네요. 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