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9주차 후기

작성자
박정희
작성일
2021-04-21 02:11
조회
109
‘존재론적 측면에서의 모나드’에 대한 채운샘의 강의를 정리하여 옮깁니다.

모나드론 초반부분의 명제들 즉 단순한 실체, 자연의 진정한 원자, 단 한번 창조되거나 소멸한다, 창이 없다, 모나드의 지각과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라이프니즈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지각론, 인식론으로 말해진다. 오랫동안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논리학’에만 갇혀 있다가 나중에 존재론, 인식론을 중심으로 연구가 행해졌으나 정치철학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서 들뢰즈가 스피노자-실천철학이라고 말한 점을 라이프니츠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양태들의 현존적, 실천적 지점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데려간다는 점이 라이프니츠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부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말 그대로의 경험론자이다’ 라고 이야기한 부분은 경험하고 감각하는 실존을 버리지 않고 현존 그 자체로부터 시작하는 점을 들어 경험론자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우리의 경험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먼 이데아의 세계에 진짜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우리는 실재 세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면 가상의 세계만이 남는가? 니체는 가상의 세계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실재와 가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길 원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도 넘어가 새로운 윤리를 구성하기를 원한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이분법적 사고가 전제하고 있는 지점을 넘어갈 것인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공통점은 데카르트를 넘어선 점이다. 데카르트에게는 인식이라는 게 주체의 인식과 대상이 일치하는 것이고, 이것의 합치가 참에 이르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인식이라는 것은 외부의 대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인데 이것을 깨버린 것이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는 지각, 인식 같은 것이 어디에서 출발했다고 봤냐면 다 변용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변용이 무엇을 전제하냐고 굳이 물어본다면 관계를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감각하는 것을 통하여 외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한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태양이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거리에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현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현존에서 발생하는 것들과 더불어 어떻게 다르게 현존의 지평을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스피노자를 들뢰즈가 경험론자로 강조한 점을 라이프니츠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둘 다 데카르트를 넘어선 점이 있다. 데카르트에게는 신도 실체이고, 그 안에 정신도 실체고, 연장도 실체이다. 그에게는 실체라는 개념이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점을 스피노자가 비판한다. 실체라는 개념에 입각해 생각해볼 때 실체라는 것이 두 개로 쪼개어져서 다시 두 개의 실체가 있다는 것은 실체의 개념에 모순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이런 논리의 모순성, 개념의 모순성을 간과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실체 개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또 다른 사람이 라이프니츠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기원인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실체 개념을 분할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분할되면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실체란 어떤 것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근거,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실체인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연장이라는 실체는 문제가 있다. 연장의 차원에서는 쪼개면 쪼개질 수 있는 것이고 연장이란 공간적 차원을 갖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무한히 분할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무한히 분할 가능한 것이 실체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생각하는 실체는 분할할 수 없으면서 존재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여야 하는데 그것을 모나드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 및 이원론을 각각 다른 부분에서 비판한다. 데카르트에게는 연장적 실체와 사유의 실체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 것이 인간인데, 그럼 인간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두 개의 타자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통일성을 구성하는 것이 서로 일도 교차하지 않는 서로 다른 두 실체라니.  이런 문제가 있는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그리고 데카르트가 연장과 사유, 이 두 가지로 나누는 순간 그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기계론적으로 해석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라이프니츠도 그것을 넘어가고 싶어했다.

이것은 마징가제트와 로봇 태권브이와의 차이점과 비슷하다. 마징가제트는 머리 부분에 뚜껑이 열리고 조정자가 몸의 각 부분을 조정기로 조정해야 움직이는 시스템이고, 로봇 태권브이는 철이가 로봇에 들어가 태권도를 하면 그와 같은 몸짓으로 태권브이가 움직이는 작동방식이다. 이 두 방식은 근원적으로 다른 작동방식인데 데카르트는 마징가제트와 같은 방식이다. 조정자가 들어가야 마징가제트가 움직인다. 여기서 ‘조정자가 명령을 내리는 것’을 ‘뇌’라고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전에 마징가제트는 철 일뿐이다. 그러나 로봇태권브이는 철이와 동일체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뇌와 육체가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와 같이 데카르트에게는 우리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신의 기능이 없다면 기계일 뿐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 개념에서, ‘단순한 복합체’라고 말하는 우리의 육체 혹은 물체 안에 내재해 있는 분할 불가능한, 궁극적인 어떤 것을 모나드라고 말했다. 여기서 모나드라는 말의 뜻은 쪼갤 수 없음, 분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모나드에 관한 자세한 내용정리는 파일로 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나드론 1번에서 48번까지 설명해주신 부분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처음 스피노자를 접한 저에게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와 비교, 그리고 그들을 해석한 들뢰즈, 라이프니츠에서 독일의 관념론까지 이어지는 서양철학사의 흐름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농밀한 강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전에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을 다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조금은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적용해봐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윤리의 문제로 그리고 실천철학으로 발전해나가는 지점과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예술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지점을, 경험을 버리지 않고 현존 그자체로부터 시작하는 경험론자(스피노자)와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라이프니츠)로 구분한 지점과 맞물려 생각해볼 때 ‘그냥 지금 발 딛고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런 잠재력이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그냥 네가 그 하나를 해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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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2 09:18
    와우! 아주 꼼꼼하게 정리해주셨네요. 모나드론 강독까지 정리해주실 줄이야...! 이런 후기를 보면 감동받게 되잖아요~~
    그리고 진솔한 고백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저희가 함께하는 토론을 보면 그렇게 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ㅋㅋ 선생님이 그렇게 빼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또, 마지막에 예를 들어 주신 것은 뭔가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은데.. ㅋㅋㅋ 좀 더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군요. 다음에 여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