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아홉번째 시간(03/17) 젠더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0-03-16 04:42
조회
106
코로나19의 여파가 끈끈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푸코의 생명관리정치 9장 10장을 토론하는 자리도 조촐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 명 더 늘어 지난 시간보다 쬐끔더 큰 토론 자리를 누렸습니다. 얼른 이 국면이 진정되어 왁자한 배움터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토론 후기를 엮어보겠습니다.

이번 책 ‘젠더’는 저로서는 ‘그림자 노동’과 달리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비기너스2기 때와는 달리 일리치의 책과 몇 권 씨름한 덕분인지 글이 재미있기까지 했는데, 젠더는 각주도 너무 길고 글씨가 깨알 같기도 하고 ‘버내큘러’와 젠더, 섹스라는 개념이 통 의미가 잡히지 않아 겨우 책장을 넘겼습니다. 2장으로 접어들자 약간씩 의미를 이해할락말락 하면서 일리치가 뭔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이 좀 잡혔습니다. 저는 그동안 젠더와 섹스를 네이버 지식인의 수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검색하면 젠더는 사회적인 성,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라고 나옵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 이 두 개의 섹스로 나뉘어 태어나고,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각각 남자와 여자(젠더)로 되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젠더>를 읽으면서 젠더를 단순히 ‘사회적인 성’으로 이해하고 섹스를 ‘생물학적인 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떤 실천적인 효과를 가져올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건화쌤은 일리치가 젠더와 섹스를 이야기하면서 ‘일work’이 어떤 의미로 변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었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즉 일이라는 것은 삶의 맥락에서의 표준화될 수 없는 각각의 고유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일은 임금노동만이 일이고 그 밖의 고유한 명칭을 갖고 있던 일들이 일이 아닌 게 되고 단지 소비활동 같은 것이 되거나 그림자 노동으로 평가절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일리치가 젠드에서 섹스로의 이행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죠. 옛날에는 여성도 남성도 각자의 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섹스가 되면 각자의 일은 없고 경제적으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일과 그것을 보완하기만 하는 종속적인 일로 나뉘게 된다는 겁니다. 산업화 이전에는 “이원적이고 상보적이며 지역적인” 각각의 일들이 모두가 표준화할 수 있는 일이 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현숙쌤은 이 부분에서 ‘그림자 노동’에 실린 ‘토박이 가치’ 부분에서 1492년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은 바깥으로의 침략이었다면 이사벨 여왕에게 토박이의 말들을 표준화해야한다고 고한 네브리하의 계획은 내부로의 침략이었다는 이야기를 보태주셨습니다. 즉, ‘일’이라는 것이 ‘임금노동’이라고 규정지어지자 각자의 고유한 삶의 활동들이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일과 일 아닌 것으로 편성되는 것을 보면서 언어의 힘이 무섭다라고 했습니다.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언어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에 착안한 네브리하가 놀랍다는 말씀이셨죠. 건화쌤은 이런 의견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조심해야 할 것은 자칫 그러한 논의가 언어적 조작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를 표준화함으로써 각각의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일었던 것을 하나의 일이라는 것으로 보게 됐다고 하면 언어중심적 사고로 빠질 수 있는 거죠. 푸코나 일리치의 언어에 대한 관점은 언어와 실천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이것을 지칭하는 언어가 따로 있고 그 언어가 생기니까 갑자기 못 보던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과 삶의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서 일이라는 단어를 표준화하는 것이 가능해지기도 하는 것이죠. 예컨대 자급자족하는 삶에서 누구는 양을 치고 누구는 밭을 갈고 등등 각자의 활동을 하는데 아무리 ‘일이란 이런 것이야’ 한다고 해서 금방 사람들이 그 ‘일’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바로 옆에서 똑같은 방식의 일을 하고 임금을 받을 때 비로소 ‘이게 일이야’ 하면 받아들여지듯, 실천과 언어는 항상 동시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 분의 의견을 들으며 일리치가 굳이 당시 지배적으로 통용되던 젠더와 섹스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면서 ‘버내큘러 젠더’라는 개념과 섹시즘을 대비시킨 이유가 뭘까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일리치는 <젠더>로 인해 당시 성차별 없는 경제를 주장하던 여성운동가들이나 ‘평등’을 이상으로 한 죄익운동가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일리치의 젠더 개념을 자칫 오해하면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본래적’이거나 ‘생득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리치가 “젠더가 이원적이고 비대칭적이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산업사회의 일상적인 용어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산업시대의 언어 자체가 젠더 부재의 사고에 기반하는 것이고 젠더 부재를 강요하고 있으므로) 젠더에 접근하는 길은 오직 “은유metaphor”일 뿐이라고 한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일리치는 젠더와 희소성의 체제를 대립시킵니다. 희소성의 체제란 무엇일까요? 우선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모 에쿠노미쿠스라는 주체가 상정돼야 합니다. 호모 에쿠노미쿠스는 일체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주체를 뜻합니다. 예컨대 산업시대 이전의 전통사회에서는 희소한 것으로 지각되는 성장 조건들이 없이도 남녀 공히 어김없이 성인이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호모 에쿠노미쿠스적 주체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희소한 상품을 얻어야 하고 남녀 모두 그것을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푸코가 말한대로 여러 가지 인적자원을 위한 투자가 이뤄져야한다는 것이죠.  전통사회에서는 공동체와 고유한 삶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던 일들이 산업시대에서는 희소한 무엇을 취해야 도달할 수 있는 일들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민호쌤은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희소성을 어떻게 분배하는가가 경제학의 문제가 된다”라고 한 부분을 언급하면서 희소성이란 호모 에쿠노미쿠스가 취득하려는 가치인데 그 가치는 모두에게 희소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공통된 척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버네큘러와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 같은 것도 재화로 환원해 얼마나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의 문제로 삼는다는 거죠. 희소 가치를 똑같이 원하게 될 때 가장 통치하기 쉬워지는 주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현숙쌤은 <그림자노동>의 서문에서 일리치가 ‘희소성의 역사’를 연구 주제로 한 것은 서양근대사를 시장경제가 자급자족 경제로부터 ‘뽑혀 나온’ 과정으로 본 칼 폴라니에게서 얻은 착상이었다고 하면서 ‘현대화된 가난’이나 ‘역생산성’의 개념이 그것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씀도 보태주셨습니다.

토론 과정에서 건화쌤은 일리치가 푸코가 말한 “품행의 문제”를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조건을 바꾸거나 더 낫고 더 평등한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관계 맺고 있는가를 봐야 하는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시대적인 조건이 규정하는 공리들 즉 평등 같은 것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죠. 이때 평등은 모두가 소득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상품을 공평하게 소비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런 평등 자체가 환상인데 이런 환상을 지속시키려면 생산량을 계속 늘여야 하고 경제성장을 해야 합니다. 발전과 성장을 하면 할수록 그림자경제도 커질 수밖에 없는 거죠. 일리치는 이 책을 쓴 목적이 “젠더의 역사가 아니라 희소성의 역사 내에서 젠더를 섹스로부터 풀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들을 숙고”하고 “쇠퇴기의 중세를 되새겨보면서 새로운 경제질서가 양심을 통해서 영혼 속으로 잠입하는 과정”(P210)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일리치가 상품 소비가 삶의 조건이 아니었던 시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삶이 상품 소비활동으로 대체된 현실을 낯설게 보라는 의도라고 봤 습니다. 더불어 각자의 ‘아스케시스’를 만들어나가라고 촉구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전체 2

  • 2020-03-17 14:56
    정말 일리치의 논의는 저희에게 언제나 일리치 자신이 제기해왔던 문제들을 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같아요.
    물론 표면적인 결론은 마이너스 성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자율성과 품행, 자급자족적 삶의 회복의 문제가 다 들어가 있구요.
    다소 자유로웠던(?) 세미나가 논점별로 잘 정리되어서 후기로 탄생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샘~~

  • 2020-03-18 11:45
    와아~ 토론 내용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또 더 생각해볼만한 지점들을 상기하게 되는 알찬 후기네요! 감사합니다. 샘 후기를 읽으면서 일리치의 무엇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건 마지막에 말씀해주신 '아스케시스'의 차원 때문이 아닐까요? 제도나 기술 등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식의 구도 자체가 일리치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일리치는 (니체처럼) 무엇인가에 의해 보장되는 평등이나 누군가의 인도에 의해 얻게 되는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명령하고 복종하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