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아홉번째 시간(03/17)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3-15 22:55
조회
74
페미니즘 담론들을 접하다보면 종종 이런 비판을 듣게 됩니다. 구세대 좌파들이 의존하는 맑시즘적 계급투쟁의 구도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은폐하고 있다고요. 계급투쟁은 남성 자본가와 남성 노동자의 싸움이며, 그들은 이념적으로 적대적임에도 공히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해서는 지극히 억압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소위 ‘진보 개저씨’들의 주류적이고 동일자적인 감수성을 폭로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혁명적 투사라고 믿는 바로 그때(특히 그때), 어떻게 해야 파시스트가 아닐 수 있을까?”라는 푸코의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런 담론은 ‘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의 문제를 특권화시킴으로써 그것을 고립시킵니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가, 다시 말해 성차별주의자가 나쁜가 악덕 자본가가 더 나쁜가(가부장제가 더 나쁜가 자본주의가 더 나쁜가)를 두고 이상한 싸움을 벌어지게 됩니다. 또 이런 의문이 듭니다. 남성과 여성이 동일임금을 받고 유리천장이 깨져서 고위직 여성들이 더 늘어나면, 우리는 (아니면 적어도 여성들은) 더 자유로워질 것인가? 혹은 이 경우에 자신의 예속적 지위로부터 벗어나 능동적 삶을 사는 것과 모두가 평등한 출발점에 설 수 있도록 사회를 개선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며, 우선 평등한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져야 비로소 자유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정리는 안 되지만 대략 이런 질문들이 들었습니다.

“나로서는 비섹시스트의 ‘경제’를 추구하는 것이 섹시스트의 경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터무니없어 보인다. 나는 이 책에서 경제학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섹시스트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낼 것이며 또한 ‘희소성을 전제로 하는 가치의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가정이 지닌 섹시스트의 본성을 밝힐 것이다.”(이반 일리치, 『젠더』, ᄄᆞ님, 17쪽)

저는 일리치가 『젠더』에서 제 질문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리치에 따르면 ‘경제’는 성차별을 전제로 작동합니다. 이러한 진술에는 ‘평등’에 대한 일리치의 독특한 관점에 전제되어 있는데, 일리치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동일한 성(unisex)을 전제하는 순간 우리는 섹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학은 희소성을 전제로 모든 가치들을 일원화합니다. 예를 들어 산업사회 이전의 토박이적 삶 속에서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은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가치’라는 추상적인 말을 들이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급자족적인 삶에서 균질화된 ‘필요’라는 개념은 작동하지 않으며 각자의 일은 각자의 삶과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될 뿐 생존을 유지하거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희소한 상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누구도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평등하게 됩니다. 분명 여기에는 남녀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는 위계적 차이가 아니라 상보적 차이입니다.

제 고민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역시 (어떤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듯) ‘계급갈등’이라는 구도는 분명 무언가를 은폐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기서 은폐되고 있는 것은 바로 젠더의 상실입니다. 즉 각자의 비교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삶의 방식 속에서 각자의 젠더를 표현하는 토박이적 삶의 해체입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욕구와 필요가 전제되고 우리의 모든 활동들이 경제학적 가치를 통해 인식 가능하게 될 때, 거기에서는 필연적으로 가치 있는 일과 가치 없는 일(정확히는 일과 일이 아닌 것), 생산적인 성과 비생산적인 성 사이에 차별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죠. 일리치는 버내큘러적인 젠더의 상실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한 우리는 결국 경제학적 구도 안에서 헤매게 될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공식 경제는 비공식 경제를, 노동은 그림자 노동을 늘 전제한다는 점에서 산업사회가 굴러가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은 재생산될 수밖에 없고, 설령 기적적으로 중성적인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건설된다 한들, 그것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활동으로부터 배제되고 자신의 역량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일 것입니다.

공지입니다. 다음주에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11장은 민호가 12장은 제가 발제를 맡았습니다. 간식은 민호와 지영샘입니다.
전체 1

  • 2020-03-16 09:23
    아하 조금 이해가 갑니다. 자급자족적 삶의 형태에서는 필요 균질화되어 있지 않으니, 가치도 공통 척도가 없는 거군요. 그러니 전부 비균질적(혹은 불평등)이지만 역설적으로 평등하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