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7월 5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6-29 12:10
조회
151
 

막막하기만 했던 스피노자가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1, 2부는 지옥이었어요..... 하지만 채운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음을 상정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책을 읽어도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저번에 하신 ‘텍스트’ 이야기와 짜맞춰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글자 하나하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짜깁기 하듯 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무엇을 명료하게 이해한다고 느낄 때가 오히려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돈 후앙은 ‘배움의 길에서 마주치는 네 가지의 적’을 얘기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 번째, 생각했던 것과 다른 공부로부터 느껴지는 두려움, 두 번째, 무엇을 명료하게 아는 것, 세 번째, 대가가 되어 아는 것이 권력으로 작동되는 것, 네 번째, 늙음에서 오는 피로함으로 인한 게으름입니다. 들으면서 엄청 뜨끔뜨끔했습니다. 벌써 저는 제 앞길을 스스로 막는 적이 되고 있었습니다. ㅎㅎ...... 들뢰즈는 배움을 영토로부터의 ‘도주’로 사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모르는 것도 같이 늘어납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스피노자식으로도 표현해주셨는데, 100쪽 중에서 99쪽을 몰라도 1쪽만이라도 이해했다면 그 이해로부터 나오는 기쁨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인 스피노자에게 정을 붙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스피노자에게서 가장 재밌고, 기발하다고 느낀 지점은 이성을 정서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서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상태를 무능력한, 예속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속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무지한 인간은 정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이해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미지만을 더듬거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쾌락만이 유일한 기쁨인 것처럼 사유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런 예속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성과 정서의 합치를 말합니다. 즉, 자신에 대해 이해하면 느끼는 방식이 달라지고, 느끼는 방식이 달라지면 욕망을 다르게 구성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타인과도 기존과 다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존재의 역량은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 만큼입니다.

스피노자를 읽을 때 가장 크게 오해했던 것은 그가 ‘인간의 모든 의지는 자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다는 말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관념을 구성하는 원리가 변용의 결과라는 인간의 조건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의지 일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다르기 구성하기 위해서는 의지 및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1부 정의 7에서 자유와 제약을 동시에 말하는데, 이것은 상반된 것을 얘기하기보다는 제약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구성해내는 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맨 등등 어떤 초인적인 사람들,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선망합니다. 이런 것들을 상상하고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무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자신에 대해 이해한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세계에 갇힌 사람, 곧 타자에 대해 무심하다는 것은 기쁨이 어떻게 촉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관계에서 상대방을 기쁘게 만들지 않고 기쁘기란 불가능합니다. 나는 기쁘지만 상대방을 불행하게 했다면, 그는 나를 미워할 것이고 나도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서로의 역량을 떨어트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이 언제, 어떻게 증대되는지 이해한 사람은 심지어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일지라도 상대-나의 관계보다 전체의 관점에서 조망하여 그것조차 기쁨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인내를 갖고 견뎌내겠다는 식의 수동, 반응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악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그와 나의 관계에서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아는 순간 단순히 그를 나쁜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그와 다른 식으로도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것입니다. 공통관념을 구성해야 하는 필요성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람에게는 동성애자는 악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고착된 관념, 관계야말로 가장 무능력한 상태, 예속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의 역량은 다양한 독특한 실재들과 변용하는 만큼입니다.

채운쌤은 가장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했던 사람들로 성인을 얘기하셨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속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 속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 역시 그런 조건들을 위해 노예화 되지 않았다는 것에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나 부처, 노자, 장자, 공자, 간디 등등이 만나는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성인에 대해 ‘영토에 갇히지 않았다’고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출가’, 한 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삶으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비로울 수 있었던 것, 타자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영토로부터 끊임없이 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채운쌤은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온화하고, 너그러운데 왜 혁명의 이미지는 항상 엄숙하고 비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혁명적일 수 있는 지점은 모든 이질적인 것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역량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성인이었던 것이라면, 자기 역량을 키우는 것, 윤리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 되지 않을까요?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타자와 관계 맺음으로써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조건인 자본주의는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고착화시킵니다. 채운쌤은 스피노자를 통해서 혁명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타자와 관계를 다양하게 맺는 것이 역량을 키우는 것이고, 자유일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5부를 ‘자유’라는 주제로 공통과제 하나와 채운쌤이 제시해주신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가?’라는 질문에 맞게 에세이의 제목과 개요를 쓰시면 됩니다. (에세이는 스피노자의 신과 양태, 인식, 정서, 자유를 유념하시고 쓰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1교시는 5부에 대해서 토론하고, 2교시는 서로의 개요를 가지고 난상토론을 하고, 3교시에 선생님의 강의가 있습니다.

 

간식과 후기는 저랑 지연쌤입니다. 모두 다음 주에 봬요~
전체 1

  • 2017-06-29 22:33
    지난 시간 수업 내용이 새록새록 생각나네요. 기쁨에 의해 촉발되는 삶, 공부. 참 좋네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생각만 해서일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