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6.28 절차탁마Q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7-01 21:00
조회
161
이번 주에는 『에티카』 4부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번 주 채운샘의 강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완전한 이해라는 망상을 버려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해에 대한 망상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죠. 『에티카』와 같은 난해한 책을 읽다보면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기 십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경우 자포자기는 자만심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스피노자는 4부 정리 55에서 “극도의 자만심 내지는 극도의 자기비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극도의 무지”라고 이야기하고, 정리 56에서는 자만심과 자기비하 모두가 약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를 읽는 행위와 관련해서 보면, 자신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믿는 자만심이나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낙담하는 자기비하 모두 무지에 기반하고 있으며 약한 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죠.

채운샘은 ‘완벽한 이해’라는 환상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조건 속에서 텍스트와 만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연한 마주침들 이전에 텍스트의 의미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텍스트에 대한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부의 서문을 보면 스피노자가 누구보다도 이러한 의견에 동조했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완전/불완전이란 우리 머릿속에 있는 보편 관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이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 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스피노자는 이해가 안 되고, 또다시 막막할 뿐이죠(ㅠㅠ). 하지만 적어도 ‘완전한 이해’라는 상에 고착되어 자기비하에 허우적거리는 상태로부터는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니체 세미나 강의에서도 채운샘은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니체를 완벽하게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각자가 놓인 조건 속에서 니체를 가장 매력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티카도 이렇게 읽어 본다면 어떨까요?

4부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스피노자가 예속을 정념과의 관계에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예속을 이야기한다기에 뭔가 새로운 개념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인가 했지만, 4부에서 스피노자는 3부와의 연장선상에서 정서들의 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정서의 문제를 통해 예속을 사유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령 우리는 생산력이 증대해서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철학을 하고 시를 쓰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스라면 대답은 ‘예’겠지만, 스피노자의 답은 ‘아니오’입니다. 채운샘은 우리의 예속이란 정서 상태의 재생산과 같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예속적 주체도 마찬가지겠죠. 예속적 주체는 무언가를 행하지 못하도록 억압당하거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무언가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규정된 방식으로밖에는 스스로를 주체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속적’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니까 푸코와 스피노자는 모두 외부 원인에 의해 휘둘리는 수동적인 상태를 예속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뜬금없지만) 최근에는 ‘시발 비용’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홧김에 산 치킨 값이나 짜증 때문에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상황에서 탄 택시비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좀 더 범주를 넓혀서 보자면 스트레스 때문에 하는 의미 없는 소비가 여기에 속하게 될 텐데요, 최근에는 이런 소비 경향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자본주의는 우리의 정서와 밀접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들었던 강의에서 채운샘은 자본주의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자족’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정서적인 자족 또한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저항은 당위가 아니라 기쁨이라는 말이 정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되는 것, 능동정서로 이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일이 아닐까요?

채운샘 강의 중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성을 따른다는 것은 꼴리는 대로(?)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꼴리는 대로 한다는 것은 사실 외부 역량에 의해 추동되는 수동적인 상태를 나타내며,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유용한 관계들을 구성할 수 없죠. 그렇다면 본성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채운샘은 모든 존재는 변이적 존재이며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스피노자의 우주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용을 본성으로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는 항이 먼저 있어서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용을 겪는 것이라면 변화와 무관한 본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선차적인 것은 변용이죠. 그런 점에. 서 스피노자가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한 코나투스, 즉 독특한 실재의 본질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되기’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교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자기 꼴리는 대로 하는 것도, 자기 자신만을 고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변이의 역량을 늘려가는 것, 다른 것들과 공통적인 것을 계속해서 구성해가는 것이야말로 본성에 따르는 삶이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본성을 유지하는 것과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 사이에는, 홉스가 가정한 것 같은 단절은 전제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벌써 에세이가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왔네요. 다들 미리 준비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저는 물론 그러지 않고 있구요^^;). 저는 빨리 5부를 읽으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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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3 21:32
    정서의 능동과 수동을 어느덧 좋음-선과 나쁨-악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네요. 능동이 저항이 되고 수동이 예속이 된다는 말은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단순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하네요....
    능동과 수동=기쁨과 슬픔, 자유와 예속, 2종 인식과 1종 인식....아직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