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첫 시간 후기 + 두 번째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1-10 02:05
조회
125
드디어 소니 다섯 번째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라니!) 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무섭도록 오래 지속된 억압에 저항해온 정신, 그러다가 이제 갑자기 건강에 대한 희망, 회복기의 도취감에 사로잡힌 정신의 사투르날리아 축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니체에게 『즐거운 학문』은 일종의 ‘전환기’였던 모양입니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소니도 『즐거운 학문』과 함께 일종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고, 책이 바뀌고, 새로운 분들이 신청하시면서 멤버도 바뀌었죠! 저로서는 앞으로 세미나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갈지 기대되는 한편, 전환기인 만큼 더더욱 분발해야한다는 약간의 부담감(?)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뭔가 얻어갈 수 있는 세미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세미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소개 시간을 갖고 〈메시나의 전원시〉, 〈제 2판 서문〉, 〈“농담, 간계 그리고 복수”〉를 함께 읽은 뒤, 짧은 토론으로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토론 시간에는 첫 시간임에도 많은 이야기들과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습니다. 니체의 매력 중 하나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말하기와 글쓰기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아닐까요? 니체의 글은 무한한 접속의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어떻게 니체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으며 이전의 우리 자신도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니체와 접속할 것인가? 이건 제 고민이기도 하지만, 세미나를 하는 동안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잘 잊는 것,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말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제 2판 서문〉 中) 토론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망각’에 대해 나눈 이야였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았을 때 ‘망각’과 ‘배움’은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닙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배움이란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과정이고 목적지를 향해 단계를 밟아나가는 일입니다. 이때 망각은 배워야 할 무엇이기는커녕 우리가 맞서 싸우고 저항해야 할 방해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잘 잊는 것’이라는 상식을 깨는 발언을 통해 니체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요? 니체는 목적지를 향해 단계를 밟아가고 목표치에 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쌓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배움의 이미지에, 나아가서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삶의 이미지에 도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니체는 망각을 능동적인 힘으로 이해했습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그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 명랑함, 희망, 자긍심, 현재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죠.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망각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닐 겁니다. 우리의 지각 속의 모든 미세한 것들 가운데서 사물의 윤곽과 형태를 추려내고, 우리의 무한한 경험들 속에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것들을 ‘기억’으로 구성해내는 일은 모두 망각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망각이 없다면 지각도, 기억도, 나아가 ‘나’도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매순간 아주 능동적으로 망각하는 중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구태여 망각을 ‘배워야’ 할까요? 니체가 “예술가로서”라고 한 말이 중요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때 니체가 말하는 예술가란 ‘창조하는 자’일 것입니다. ‘원본’을 재현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원본’이나 ‘본질’과는 무관한 것들을 창조하고 생산해냄으로써 유희하는 자들. 우리는 늘 습관에 의존함으로써만 지각하고 기억합니다.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익숙한 방식으로만 경험하는 것이죠. 수동적으로 망각하고 또 기억함으로써 세계를 하나의 관점으로 재편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망각해야 할 대상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 우리의 습관적인 사유와 인식의 패턴일 것입니다.

수정샘께서 최근에 보고 계신(?) 드라마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은 차나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는 칩이 발명된 미래인데, 충분히 예상되는 것처럼 드라마에는 칩에 기록된 ‘진실’에 집착하여 자신의 삶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망쳐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심지어 우리 삶의 1분 1초를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진실’이 깃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을 구성해내는 우리의 해석 의지일 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망각이란 우리의 지각과 의지와 욕망을 ‘진리’, ‘진실’, ‘목적’ 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쾌활함”을 되찾는 일이 아닐까요? 니체 읽기가 우리의(저의) 허물을 벗어내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지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즐거운 학문』 1부(p.65~123)를 읽어 오시면 됩니다. 찬찬히 읽고 질문이나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발제는 수늬샘께서 맡아주셨고, 간식은 성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