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즐거운 학문》5부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2-07 11:36
조회
124
이번 주에는 《즐거운 학문》 4부를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재밌는 구절이 많은 4부였는데, 제가 또 시간조절을 못하는 바람에(ㅠㅠ) 여러 아포리즘들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시간으로 미뤄둬야겠습니다.

이번에 가장 중점적으로 이야기되었던 구절은 295절과 307절, 338절이었죠. 수늬샘이 베스트로 뽑아주신 295절은 습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단기적 습관과 지속적 습관, 그리고 습관이 없는 상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제가 재밌었던 것은, 우리가 흔히 니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니체가 아무런 습관도 없는 즉흥적인 삶을 혐오했다는 점입니다. 니체에게 자유란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습관들을 형성하고 또 그것들로부터 떠나오기를 반복하는 과정이었던 모양입니다.

307절은 가장 오래 논의된 구절이었죠. 여기서 니체는 부정과 긍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락샘께서는 307절에서 니체가 긍정과 부정 사이의 인식론적 위상(?)을 전복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부정한다.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을 긍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보면, 니체가 ‘부정(혹은 비판)’을 긍정에 ‘대한’ 것 혹은 긍정 이후에 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체에게 부정과 긍정이란 서로가 서로를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의 신체는 매번 이전의 그 자신을 부정하고 다른 상태로 이행함으로써만 스스로를 긍정합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죠.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있지 않고 단 한 번도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은 스스로를 무한히 긍정합니다. 변화와 생성 자체가 자연의 자기긍정인 것이죠. 우리가 행하는 긍정과 부정을 여기에 비추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개 부정(파괴, 비판)하지 않음으로써만 긍정하고, 허물을 벗고 새로운 긍정에 이르는 일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부정하지 않나요? 니체라면 우리가 부정도, 긍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338절도 굉장히 재밌었는데, 여기서 니체는 ‘동정’이라는 정서를 거의 난도질 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정은 동정하는 자에게도, 동정 받는 자에게도 해로운 일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동정이라는 감정의 본질은 “타인의 고뇌에서 본래의 개인적인 것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동정은 고통 받는 이가 끊임없이 다른 것에 의존하여 결코 “나 자신의 하늘”에 이르지 못하도록 그를 왜소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동정을 하는 일 또한 “자신의 길”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 자기 문제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 이런 일들은 “너무 어렵고 까다로우며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감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자기 문제가 감당하기 힘들 때 우리는 이웃에게로 건너갑니다. 저는 제 글이 안 써질 때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조언을 해준답시고 나서곤 합니다. 사실은 그게 친절을 가장한 자기도피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338절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후반부였습니다. 니체는 “네 친구들에게만 도움을 주라! : 그것도 네가 자신을 돕는 방식으로만”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니체는 타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 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니체가 동정의 대상을 ‘이웃’으로, 도움을 줄 상대를 ‘친구’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친구’와 ‘이웃’은 구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나타나는데요, 거기에서 ‘이웃’은 ‘가까이 있는 자들’로, ‘벗’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자들’로 비유됩니다. 가까이 있는 자들이란 우리와 닮은, 우리와 동일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 자신과 구별되지 않는 동일자들입니다. 그에 비해 니체가 말하는 친구,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자들은 결코 건너갈 수 없는 ‘거리’를 지닌 미지의 존재가 아닐까합니다. 이때의 거리란 관계의 가깝고 멂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 자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거리’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동일시 할 수 없는, 늘 타자성을 품고 있는 존재. 이러한 의미의 친구와 나누는 우정이란 단순히 배려하고 보듬어주고 연민을 품는 방식일 수는 없겠죠. 니체는 우정을 위해서는 전쟁을 벌일 수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서로의 적이 되어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338절 뒷부분에서 말하는 친구에게 베푸는 도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늘 타자성을 품고 있는 존재가 친구라면, 우리는 그를 안일한 방식으로 동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친구를 돕기 위해서는 우리의 안전한 위치를 버리고 그와 싸움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칠 것도 각오해야겠죠. 우정을 사랑하시는 니체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벗에 대한 연민의 정은 딱딱한 깍지 속에 감추도록 하라. 너 그것을 깨려다 이빨 하나쯤은 부러뜨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은 섬세하고 감미로운 맛을 낼 것이다.”

* 공지 : 다음 주에는 《즐거운 학문》을  361절(361페이지)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다음주에  《즐거운 학문》을 모두 읽게 되면 에세이 발표 전에 한 주가 남게 되어서,  그때는 '뤼디거 자프란스키'와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각각 쓴 《니체》(두 권 다 제목이 '니체'입니다)중에서 《즐거운 학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발췌해서 읽고 토론을 할 예정입니다.  책은 복사해드릴테니 따로 준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식은 크느샘과 수락샘이 맡아주셨습니다. 각자 가장 좋았던 구절과 그 이유 뽑아오는 것 잊지마세요~~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3

  • 2018-02-07 12:20
    "'긍정과 부정이 서로를 함축한다' 저도 이 점을 배워보고 싶습니다!"(거나님의 우정을 기다리는 포오즈로~ ^^) 니체도, 세미나도 엄청 재미있었군요!

  • 2018-02-08 11:37
    신영복의 '돕는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돕는다는 것은 내 우산을 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가까워지지 않는 구절이네요. 니체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 2018-02-08 19:29
    시간이 더 있었으면 동정해야할까 말까 거수결정 할 뻔 했죠^^ 아무튼 열정적이고 후끈후끈한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