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4월 13일 <카프카 일기 6-9권> 후기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04-13 16:03
조회
223
2017.4.13 카프카의 일기 6-9권


카프카 일기 6~9권을 읽었습니다. 1912~1914년에 쓰여진 이 일기들은 <변신>과 <선고> <화부> 등의 작품이 태어난 창작력이 폭발하던 시기라고 해요. 이 시기의 일기는 날짜가 쓰여있다 뿐이지, ‘일기’인지 ‘작품’인지 ‘꿈’인지 구분히 모호한 글들이 섞여 있었어요. 현실의 경험이 꿈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꿈같은 이야기가 작품이 되기도 하구요.


이 점을 포착한 지니샘은 카프카의 <꿈-쓰기>를 주제로 글을 써오셨는데요. 진희샘은 ‘꿈의 내용’보다 ‘꿈이 표현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카프카를 풀어내셨는데 '무엇을 쓰는가' 보다 '어떻게 쓰고 있나'의 측면에서 카프카를 조명해보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카프카의 일기에 나타난) 꿈속에서 사람은 가로등이 되기도 하고,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모호하고, 공연장인데 연설을 해대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전복되고 뒤섞여 있는 곳이 꿈속이다. 꿈속에서는 실제와 실제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하다. ‘정신 차리고’ 쓰면, 더럽고 악취 나는 것, 추한 것, 야만스러운 것들은 모조리 제거될 수밖에 없다.> - 진희샘 발제문에서


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가 있지요. 이성이 정의해 놓는 방식들에는 하나도 맞지 않는 식으로요. 진희샘은 이런 <꿈-쓰기>의 방식이 ‘정상 분만’과는 다른 ‘온갖 것들이 뒤덮인’ 글을 출산해내는 힘이라고 보신듯해요. 그와 연관해서 진희샘이 인용한 1913년 2월 11일자 일기에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어요.



“현재 내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관계들을 기록한다.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정상 분만 때의 출산에서처럼 온갖 더러운 점액들로 뒤덮여서 내 몸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오직 내 손만이 억지로 몸으로까지 밀고 나갈 수 있으며,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407p)


실로 카프카는 잠들기 직전 혹은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밤에 글을 썼다고 해요.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글을 쓴 것이죠. 이성적으로 보면 온갖 더러운 점액들로 뒤덮여 있는 무엇이지만, 이것은 오직 내 손으로 억지로 밀어내어, 내 몸 밖으로 나온 글이기도 하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글 쓴 후에 피로감이 몰려오더라도 후련함 혹은 어떤 기쁨이 있었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카프카가 일기에서 적고 있던 꿈들은 아마 이런 점액들을 내뱉는 후련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구요.


이어서 영우샘은 카프카가 말하는 ‘글쓰기의 괴로움’ 이면에서 ‘글쓰기의 원동력’을 찾아내 주셨어요.



<(카프카는) 글쓰기를 위해 그 상처조차 스스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글쓰기는 항상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글을 쓰고 못쓰는 것 자체부터가 현실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직업과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비난하거나 도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 자체가 글쓰기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그에게 글쓰기는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와도 같다. 현실은 그의 글쓰기를 통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그 또 다른 세상이 글쓰기를 통해서 현실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영우샘의 발제문에서


영우샘이 만난 카프카는 글을 통해서 세상을 비난하거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보다, 오히려 글쓰기를 통해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점을 만들어내고,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선고>에서 보여지는 죽음은 아버지의 ‘판결’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죽음이 아니라 카프카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익사’인 것이죠. 영우샘은 <다리에서 뛰어내리면서 웃고 있는 카프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다가오는 수면을 바라보는 그 순간들이 그에게는 또 하나의 글쓰기이다.>라고 하셨는데, 전 이런 해석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이어서 선민샘은 후에 나오는 카프카의 구절을 인용해주시면서 ‘인간은 자살을 할 수 없다. 몸은 無인데 無가 無에 뛰어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나는 죽음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수경샘의 글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도 깊은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제가 이해를 못해서 전해드릴 수가 없네요 ㅜ ㅠ 대신 수경샘의 발제문에서 멋지다고 생각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할게요.



<글을 쓰는건 물론 나지만, 글을 쓰는 세계 안으로 기어들어가기 위해 나는 내가 아니어야 한다. 그곳은 ‘나의 말’, ‘너의 말’이 아니라 그저 무수한 말들이 우글우글 들려오는 존재들을 변형시키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언제나 타인들을 주파하고, 자신의 변형과 왜곡을 경험하고, 자신이 도달한 곳이 전혀 다른 곳임을 발견하고, 결국 글쓰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는다.> - 수경샘의 발제문에서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번에 일기에는 일기인듯 작품인듯 뭐라고 정의하기 모호한 글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선민샘의 표현에 따르면 ‘문장 하나하나가 새로 태어나려는 듯 꿈틀거리며 날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카프카의 일기에는 작품으로 가는 수많은 경로들이 그려져 있어요. 그래서 일기와 작품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일기>안에 쓰여진 수많은 글들에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선민샘은 여기에 대해서 아감벤의 해석을 들려주셨는데 아감벤의 <불과 글>을 무척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설명이었어요.



<아감벤은 카프카의 일기에서 ‘완성에 저항하는 힘’을 읽는다. 쓰다 만 것들, 작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들, 그 중 하나가 현실과 타협해서 작품이 된 것이라고. 카프카의 일기는 ‘작품 이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시도된  것이 아니다. 카프카의 일기에는 설계도가 없다.> - 선민샘의 강의록에서


설계도가 없는 글쓰기, 그것은 목표치에 다다르기 위한 습작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계속 써나가는 중에 만들어지는 쓰는 사람조차 예측할 수 없는 글이 되지요. 수경샘의 말처럼 카프카는 ‘글이라는 결과물’에 치중해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글쓰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듯해요. 그래서 쓰고난 글의 운명에는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았던 듯 하구요. 절친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소설을 제2의 창작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도 카프카의 이런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음.. 적고보니 중요한 펠리체 바우어와의 약혼 부분을 빠트렸네요.

일기를 읽어도 카프카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는 결론. 그렇지만 펠리체라는 존재는 확실히 카프카에게 글쓰기의 동력을 제공하는 존재였음은 틀림없어 보여요. 카프카는 펠리체와의 결혼과 글쓰기 사이에서 망설이지만 어쩐지 이 망설임이 글쓰기를 위한 구실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여튼 카프카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카프카의 말대로 글은 ‘행동을 절반밖에 묘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ㅎ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전체 3

  • 2017-04-13 16:15
    중단 없는 글쓰기를 보여주는 게 카프카의 일기라고 그게 기다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만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엄청난 질문과 비판에 어질어질ㅋㅋ 담주엔 당연한 말 없이 함 해보지요. 영우쌤 글 아니었다면 <선고>를 두고 스스로 물속에서 나아가는 것이라 말한 카프카의 평가를 걍 흘려버릴 뻔했어요. / 이응, 신속하고 성실한 후기군아~ 덕분에 복습이 신속해져 훨씬 효과적이야.

  • 2017-04-14 06:58
    카프카라는 숲! 영우 샘께서 '결혼이야말로 고독의 거처'라고 하셨던 말씀에 얼마나 웃었는지요. 고독하고 싶어했던 카프카가 결혼을 했더라면 더 많은 작품을 내놓았을텐데? ^^;;
    그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글을 썼던가? 다음주에도 풍성한 토론이 기대됩니다. ^^

  • 2017-04-18 11:34
    잘 읽고 갑니다!! 갈수록 얘기가 재미나고 깊어지네여~
    그래도 카프카 근처를 기웃거려 본 덕에 분위기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