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4월 27일 세미나 후기_벤야민의 카프카론

작성자
gini
작성일
2017-04-29 16:12
조회
183
 

지난 시간에는 발터 벤야민의 <프란츠 카프카>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카프카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도 재미있었지만, 벤야민의 글이 주는 매력도 참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사실 어려운 글이었어요. 작은 판형의 40쪽도 안 되는 글이었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몇 번을 해야 했습니다. 

 

카프카보다 200년 전에 쓰여진 <포톰킨 (혹은 빠쫌낀)>이란 짧은 이야기로 벤야민은 시작합니다. 포톰킨 재상은 자신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려있기 때문이죠. 아래 관리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슈발킨이란 하급서기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누구도 접근하기를 꺼리는 포톰킨의 방으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들어가서 모든 서류들에 사인을 받아오지요. 서류들을 본 관리들이 그런데 깜짝 놀랍니다. 서명란에 모두 슈발킨, 슈발킨....이라고 서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은 이 이야기의 두 인물, 포톰킨과 슈발킨을 통해서 카프카 작품이 서있는 세계와 거기서 살고 있는 어떤 특정한 유형의 인물들을 끌어냅니다. 포톰킨은 관리의 세계이자 아버지의 세계입니다. 관리들과 아버지는 “권력을쥐고 있는 자들… 높은 지위에 있지만 이미 전락해버렸거나 아니면 전락하고 있는 자들”이지요. 이들은 “둔감, 타락, 더러움”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세계에 균열을 내는 자, 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자가 있습니다. 슈발킨입니다. 벤야민은 카프카의 작품들에서 많은 ‘슈발킨들’을 끌어냅니다. 바로 ‘조수’라는 이미지이지요. 유명한 카프카의 인물 K도 조수입니다. 조수가 표현하고 있는 바는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빈손으로 남게 되는 충직”함입니다. 조수는 수줍은 소녀들처럼 “모든 것에 대해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지요. 조수는 잠을 안자면서도 ‘결코 지칠 줄 모르는’ 바보같은 학생입니다. 그런데 벤야민이 보기에 이런 조수들에게서 카프카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런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벤야민은 ‘무희망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동안의 세미나에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카프카는 누구보다도 구원되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절대적으로 구원되기를 피했습니다. 관리들, 아버지의 세계에 처한 인간에게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집으로부터 독립하면 구원되는 것일까요? 카프카에게 관리들, 아버지의 세계는 자신의 영혼이 갇혀 사는 ‘육체’ 자체입니다. 육체를 떠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체는 어느 날 갑자기 “갑충”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언제나 이 “타향”같은 육체에 갇혀있고, 그러나 그 곳을 떠나서는 산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육체 안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희망도 이 육체를 떠나서는 또 의미가 없지요.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마을, 타향같은 육체에게 영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육체라는 “마을에 향연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향연이 베풀어지고 있는 육체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 아닌 방식으로 꿈틀댑니다. 이 제스처들은 규정된 채로 미래를 향해 질주하던 육체 본래의 제스처와는 다른 어떤 제스처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염두에 두지 않은, 희망의 “망각” 속에서 벌어지는 어떤 삶들은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무희망성의 아름다움입니다.

 

벤야민에게 이 ‘망각’은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벤야민은 카프카에게 이것을 봅니다. 카프카의 세계는 “하나의 극장”입니다. 그것은 “광범위한 관료의 위계질서 속”이자 “건축계획들”이자, “조직”이자 “운명”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대 위에 서 있는 존재”이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입니다. 배우들에게는 종종 대사나 제스처를 까먹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좋은 배우는 아니지요. 그러나 배우가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망각한다고 해서 배우가 아니거나 연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자연극장’의 연기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극장에서 이 배우는 망각한 자의 연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몸속에서 향연이 벌어져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어떤 연기, 무대 위에서의 정해진 대사와 제스처에 반하는 연기. 아마 그 무대는 순간 움찔, 이 배우의 망각이 더 오래가면 무대는 아수라장이 될지도 모릅니다. 망각은 이처럼 기존의 세계를 흔듭니다.

 

슈발킨이 그랬고, 카프카의 작품 속 K가 그랬고, 대학생이 그랬고… 벤야민이 보기엔 카프카 작품 속에 이런 인물들이 많은가봅니다. 벤야민은 카프카 자신도 이런 인물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 이런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슈발킨은 “노크도 하지 않고, 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포톰킨) 방문의 손잡이를” 돌리지요. 소녀는 “모든 것에 대해 순순히 자신을 내맡”깁니다. 대학생은 피로를 느낄 줄 모르는 바보처럼 밤이 되어도 잠을 자지 않고 “책장을 넘기고, 종종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다른 책을 항상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집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기입해넣기도 하며, 그럴 때는 항상 얼굴을 갑자기 노트 속에 깊이 파묻기도” 하지요. 벤야민은 이런 인물들은 “아직 구원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제스처들은 ‘망각’이 몸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육체이며, 자신들이 갇혀있는 세계입니다. 거기에 거하고 있는 한 망각은 구원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구원가능성’입니다.

 

벤야민에 의하면 카프카는 구원의 세계를 원하지도 않았고 그런 세계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카프카는 다만 구원가능성 속에서 살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망각인데 이 망각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단식광대는 단식을”, “문지기는 침묵을”, “학생은 깨어있어야”합니다. 그렇게 지치지 않고 마치 무(無)와 같은 망치질을 계속해야 합니다.

 

카프카의 『일기』가 떠오릅니다. “잠을 못잤다… 아무 것도 못썼다…”같은 정말 의미없는 그 한 줄조차, 지치지도 않고, 쓰고 또 쓰는 카프카. 구원가능성의 세계에 턱걸이라도 하고 있으려는 몸짓이었을까요?

 
전체 2

  • 2017-05-01 13:14
    벤야민의 카프카 읽기는 정말 놀랍고 흥미롭고... 또 지극히 뻑뻑했지요-_-;; 그렇게 신명나게 한 작가의 텍스트를 넘나들며 떠들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ㅎㅎㅎ 모두들 방학 잘 보내시고 둘째 주에 만나요~

  • 2017-05-02 15:52
    '결코 지칠줄 모르는' 바보 라는 말이 와닿네요. 지치지 않고 무(無)와 같은 망치질을 계속하는 글쓰기 .. 또 한수 배웁니다. 지니샘&카프카샘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