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1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3-01 12:39
조회
181
드디어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채운샘의 들뢰즈 강의인 만큼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몹시 궁금해지네요. 첫 시간에는 자기소개를 겸해서 각자 자신의 각오(^^;)를 밝히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많은 분들께서 ‘올림픽 정신’을 말씀하시며 빠지지 않고 참석할 것을 약속(맹세^^?)하셨습니다. 약속 지켜주시길 바랍니다ㅎㅎ. 저는 금요일 ‘영화, 들’ 세미나에서 들뢰즈의 《시네마》를 읽고 있는데, 들뢰즈가 말년에 쓴 책이라 그런지 온갖 개념들이 총출동해서 이해하는 데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통해 들뢰즈의 개념들과 들뢰즈 철학의 큰 맥락을 파악해서 《시네마》에 대한 감을 조금이라도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에 덤으로 흄이나 칸트, 스토아학파, 라이프니츠 같은 연구실에서 이름조차 듣기 어려웠던 철학자들과 만나게 될 것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1. 오버하지 마라

뭐랄까, 제게 들뢰즈는 영원히 낯선 존재로 남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의 철학자입니다. 그의 난해한 철학과 문체보다도 그의 단조로운 삶 때문에 그렇습니다. 푸코의 경우에는 그의 삶에 대해 듣거나 읽게 되면 왠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하는데, 들뢰즈는 반대입니다. 평범하게 결혼을 해서 딸을 낳고 살았으며, 거의 파리를 떠나지 않았고, 인터뷰에 거의 응하지 않은 채 단조롭고 절제된 삶을 살았던 들뢰즈. 들뢰즈의 삶은 그의 화려한 문체나 전복적 사유에 걸맞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인상은 ‘생성의 철학자’라는 그의 타이틀을 제가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접속’, ‘도주’, ‘소수’같은 들뢰즈의 개념어들을 접하고 있으면 ‘역시 뭔가 저질러야 하나?’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은 ‘생성’을 ‘뭔가가 생겨나는 것’으로밖에는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성이란 ‘생겨나는 것’만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기도 하죠. 생성은 삶과 죽음을, 긍정과 부정을, 접속과 절단을 모두 함축합니다. 따라서 생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온갖 환상들로 삶을 정신없이 덧칠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한 환상에 탐닉하고 다양한 것들을 소비할 때 우리는 삶(=생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상태가 계속될 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음과 부정, 절단을 긍정하지 못하고 삶과 긍정과 접속에 집착하게 되는 거죠. 생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생성이 좋다!’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른 구조로 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뭔가 비일상적인 이벤트들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삶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던 환상과 자의식을 덜어내는 과정일 것입니다. 어쩌면 들뢰즈처럼 단순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다른 식으로’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철학 = 개념의 창조

들뢰즈는 ‘철학의 종언’을 떠드는 자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철학의 종언’이라는 말은 사실 ‘철학’이라는 어떤 특권적 영역을 상정할 때에 성립되는 것이죠. 그러나 들뢰즈에게 있어 철학이란 어떤 전문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자들이 다른 식으로 되기를 시도하는 한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념들을 창조할 시간과 장소가 있는 한, 거기서 행해지는 작업은 언제나 철학이라 불리워질 것이며, 설사 그것에 다른 이름이 부여될지라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라고.

들뢰즈에게 철학이란 관조, 반성, 소통이 아니라 ‘창조’였습니다. 개념의 창조. 철학자가 하는 일은 “사물들과 존재들로부터 언제나 하나의 사건을 해내”고 “사물들과 존재들에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언제나 그것들에 새로운 사건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도 어떤 관념적 세계를 앞에 두고 철학을 하지 않습니다. 철학자가 창조한 개념은 그것이 마주하고 있는 사건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단함으로써 새로운 사건을 부여합니다. 때문에 개념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죠. 철학은 진리를 찾아 관념의 세계를 떠도는 일이 아니라 개념의 창조를 통해 현실을 다르게 문제화하고 다르게 생산하는 일입니다.

철학은 ‘유용성’을 통해서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개념들이 다른 것보다 ‘낫다면’, 그것은 그 개념이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며,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을 가져다주기 때문”(채운샘 강의안)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철학 개념의 구체성과 우리의 구체성을 만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념의 ‘복제’가 아니라 개념의 ‘사용’. 앞으로 우리가 만나보게 될 들뢰즈의 작업들이 바로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철학자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의 개념을 훔쳐내기.

다음 주에는 들뢰즈를 통해 데이비드 흄의 철학을 만나 보게 될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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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5 16:24
    훔치기! 자신의 문제와 절실하게 마주한 자만이 훔칠 수 있다~~ 제일 인상깊었던 채운샘의 말씀 중 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