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3.14 주역과 글쓰기 4주차 후기

작성자
임영주
작성일
2021-03-20 14:01
조회
164
작년에 이어 <주역과 글쓰기> 시즌2가 시작되고 4주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올해는 기존 멤버들의 수 만큼이나 뉴-멤버 분들이 합류하셨고, 함께 주역을 공부하는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이번 학기는 계사전과 64괘를 읽고 조별로 토론하면서 주역의 세계관과 괘들이 주는 지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처음 주역을 시작하면서 끝없이 나오는 모르는 한자들 찾고, 진도 따라가기에 급급해서 뭔가 멋있고 좋은데 그냥 넘겨버린 아쉬움 지점들을 시간을 들여 함께 얘기하고 다시 곱씹어 볼 수 있어서 참 좋은데요. 두 번째 읽었는데 이러면 세 번, 네 번째 읽으면 또 얼마나 새로운 것들이 보일까 하는 기대에 벌써 설레입니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다는 헤어나올 수 없는 주역의 매력에 올해도 기쁜 마음으로 허우적댈 예정입니다. 이번 후기는 계사전을 위주로 정리합니다.

이번에 계사上전 8-10장을 읽었는데요. 7장까지는 음양이라는 오묘한 작용이 어떻게 천지만물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펼쳐냈다면, 8장에서는 이런 우주의 작용원리를 통찰한 인간(성인)이 그것을 인간 세상의 복잡다단한 층위에 적용시키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8장에는 오래된 삶의 지혜의 보고인 64괘의 괘사, 효사들을 보고 당대의 지평에서 문제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자님의 글쓰기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하는데요. 채운샘은 주역과 같은 고전을 읽을 때는 그것이 쓰인 원래의 의도나 맥락을 찾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공자님처럼 그것을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어떻게 새롭게 맥락화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글쓰기하면서 늘 듣는 소리가 ‘문제화를 시키지 못한다.’인데요. 삼 천년 전의 지혜의 보고인 주역을 읽으면서 ‘아 좋구나’ 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사유를 밀어붙이고 싶지 않은 게으름, 귀찮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9장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주역점을 치는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10장에서는 이렇게 점을 치는 것이 자신이 역의 어떤 것에 주목하는가에 따라서(言, 動, 制器, 占筮)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역의 효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이런 점만 보더라도 주역은 현실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연동되어 작동하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계사전 8장까지는 우주의 탄생에 대해 그렇게 멋있고 장대하게 펼쳐냈다가 9장에서는 갑자기 점치는 과정을 시시콜콜 세세하게 적어놓은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주역은 결코 현재의 삶과 동떨어진 멋있지만, 닿을 수 없는 보편진리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는 어김없이 인간의 삶에 통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30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주역의 지혜는 여전히 현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역과 시간()

이번 계사전에서 공통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것이 ‘시간’의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주역을 공부하면서 ‘변화를 사유한다’, ‘때에 맞게 행동한다’라는 말을 귀에 닳도록 듣고 있는데도, 여전히 시간은 나와 동떨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 시간이라고 하면 ‘시간이 흐른다’와 같이 나의 바깥에 시간이 객관적으로 있고, 그것이 과거에서 미래로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조바심을 낸다거나 혹은 이런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쪼갤 수 있고, 그것을 알뜰하게 쓰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도올샘도 말씀하셨듯이 시간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우리 의식의 개념장치’일 뿐이라고 합니다. 즉,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도 우주의 변화에 종속되어 살아가므로 이런 변화를 거스르고 인간의 의식적 노력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즉, 개체의 삶은 시공간의 변화에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는 천지의 변화를 살아가는 그 자체로 우주적인 존재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천지의 이런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일수록 우주의 때와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기꺼이 그 변화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계사 상전 10장에도 군자가 장차 일을 하려는 것에 대해 역에 물었을 경우에는 그 결과에 대해서 ‘메아리와 같이 받고(受命也如響)’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심한듯 아무렇지 않게 쓰여져 있지만, 우주의 때에 ‘메아리’처럼 받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저만 돌아보아도 언제나 나에게 좋으면 좋고, 불리하면 나쁜 것으로 믿으면서 매사를 그렇게 일비일희하면서 살아왔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당연하게 좋다고 여겼던 것, 올바름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 사실은 언제나 나의 안락함과 유리함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의 확신이나 믿음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회린(悔吝)만 있을 뿐, 길흉(吉凶)은 없다

채운샘은 우리가 굳이 어렵게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대단한 진리를 찾거나, 흉함은 피하고 길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주의 변화는 때로는 개체인 나의 입장에서는 재앙이나 흉함으로 나타날 수 있으나 다른 지점에서는 길함이 될 수 있고, 또 그 반대도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통찰과 지혜를 계속 연마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이유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라고 하셨죠. 그리고 이런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우주변화의 원리를 이해했을 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도 잘 안 되는 괘사를 읽고 또 읽는 것이 사심으로 가득한 편협함에서 벗어나서 전체의 시공간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우주적 시야를 가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샘은 그래서 주역에서는 길흉(吉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린(悔吝)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여기서 ‘회린’이란 길흉을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이킬 수 있는 사유의 태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길흉을 자기 위주로 보는 태도를 벗어나서 전체적인 관계를 통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변형해나가는 만큼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도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매번 이리저리 감정의 동요를 겪고 매사 구별 짓는, 한없이 가벼운 자신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데요, 공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못난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래도 지금껏 못나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는 (잘 될진 모르겠지만) 주역의 지혜를 붙들고서 다르게 살아보려고 애를 써보긴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후기가 늦었습니다. 아휴 죄송! 내일 만나요!
전체 2

  • 2021-03-20 14:37
    아휴! 드디어 후기가 올라왔군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침대를 바꾼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사전을 읽어가며 계속 상기중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어려운 도!

  • 2021-03-20 22:15
    역에 물었을 경우에는 그 결과에 대해서 ‘메아리와 같이 받고(受命也如響)'라는 구절이 생각을 계속하게 하네요^^~ 내 마음이 어떤 위치에 있을 때에 메아리와 같은 결과를 받을 수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