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4월 19일 9주차 후기

작성자
정랑
작성일
2021-04-20 16:02
조회
123
1학기 9차시 수업은 계사 하전 6~8장과 주역의 택풍大過 괘와 택수困 괘를 토론하고 채운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별 토론한 내용을 들으신 채운샘은 토론한 내용이 ‘매우 관념적이다’고 하셨다. 우리가 주역을 공부하면서 ‘역이 어떤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공부하는 게 아니라고 일침을 가하셨는데요. 안다는 것은 내 질문과 맞딱뜨려 역의 원리가 내 삶의 국면에서 치고 들어와 자기의 무의식에 새겨질 때라고 하셨습니다. 공부가 관념적으로 되는 이유는 평소에 질문을 갖고 살지 않다가 공부의 장에 와서 질문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평소 자기 존재의 근거에 대한 질문이나 자기가 지금 겪는 번뇌에 대한 질문을 늘 화두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강의 중 曲而中(곡하면서 중하다)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는데요, 숙제를 하듯 책을 읽으려고만 하는 공부를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다음은 채운샘 강의 내용입니다.

 
  1. 공부 법 : 曲而中


중을 우리가 깨닫기는 어렵지만 구체적인 곡 속에서 중을 알 수 있다. 주역의 언어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세밀하고 매우 구체적이다. 호랑이, 표범 들의 사물 뿐 아니라 사건도 매우 구체적인 경험속에서 통찰한 것이다. 이것이 곡, 굽이굽이에서 중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주역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자면 계사전의 君子安其身而後動- 군자가 몸은 편안히 한 후에 사회적 활동을 한다 - 을 얘기할 때 여기서의 안(安)을 얘기할 때 무턱대고 ‘편안함이람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하면 논의가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우리의 당면한 상황, 우리가 늘 편안하지 않음에서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편안하지 않음이란 자기 환멸, 우월감, 자만감, 열등감, 못마땅함, 애착에 시달리는 등이다. 이런 많은 저항감들로 인해 잠도 잘 못자고 소화도 안되는 등의 고통을 겪는다. (우리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몸은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느낌이나 내 몸의 변화, 기운으로 알게 된다. 이를 affection(감지되는 기운)이라고 한다.) 편안함을 묻지말고 우리는 왜 이런 불안함을 겪는지를 먼저 분석해봐야 한다. 불안함은 우리의 끊임없는 마음의 교란 상태이며 이것이 곧 번뇌, 병disease이다. disease는 ease하지 않음인데 편안하지 않다 보니 늘 자기 변명이 많고 자기 행위를 정당화면서 내면을 뚱뚱하게 한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는 등의 얘기와 변명이 많음은 간이하지 않음이다. 자연의 간이함, 꽃이 피는 데는 정당화가 필요없다. 나를 세심히 의심하면서 내가 이런 마음의 교란과 번뇌에 붙들려 있구나, 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이 글쓰기와 세미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 문제로부터 나아가 어떻게 한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 이게 공부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왜 나는 편안하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에 시달리고 있는가? 불교에서는 분별심 때문이라고 하는데 분별심이란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는 것이 자기 판단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편안하지 않음이 사심(私心)때문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한정된 경험에서 판단한 억견doxa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 보는 데서 오는 오해가 대부분이다.

이런 감각 판단에 매몰되어 있다. 우리가 늘 자기 판단을 의심해 보고 자기를 해체해야 편안할 수 있다. 주역의 중(中), 정(正)이란 과(過)나 불급(不及)과 반대되는 말이다. 과도 욕심이지만 불급도 욕심이다, 불급은 나에게 다칠까봐 안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몸사림에서 오는 것이다. 안(安)이란 과, 불급이 없는 상태,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행위함이고 그래야 사심이 없다. 그 이후의 행동은 편안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기 떳떳함이 가능하다.

 
  1. 공부의 방향 : 반성과 복, 그리고 우환의식


주역의 반성(反省)이나 복(復)이라는 것이 어디로 가는가? 서양에서 반성reflection은 사람들의 시선, 평판, 도덕적 기준에 맞춰서 삶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동양의 반, 복은 도의 운동이다. 과도 불급도 없는 그 자리, 곧 사심이 없는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 反과 復이다. 돌아감의 기준이 사회적 규범 따위가 아니다. 사심을 내려놓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인간의 윤리가 도의 기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전복적인 사고이다. 여기에서는 도의 운동을 터득하지 못한 자는 돌아갈 수도 없다. 도의 운동을 터득한 자만이 도의 기준에 비추어서 자기 자신을 단도리할 수 있다. 도를 사회적 규범에서 찾지 말고 나에게서 찾으면 된다는 의미에서 주역은 매우 주체적인 철학이다. 개체의 본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고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다.

계사전에 나오는 우환의식은 쉬운 말로 하면 자비(慈悲)심이다. 우환, 근심하고 걱정하는 게 자기에 대한 게 아니다. 나와 공존하는 모든 것에 대해 내는 마음이다. 慈는 나를 있게 하고 나를 살게한 모든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감사함이고, 비(悲)는 모든 존재의 슬퍼함에 나도 같이 슬퍼함이다. 비(悲)심에 해당하는 게 우환의식이다. 백성들과 함께 기뻐할 것인가? 희생제에 쓰일 소가 울면 그걸 보는게 매우 마음이 아프다. 생물에 내재한 만물에 대한 공감이다. 우환의식은 성인이 갖고 있는 것이다. 우환의식을 가진 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업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것으로 우환의식에 동참할 수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갖는 마음,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출발점이 되어야 문제점이 보인다.

매번 헉헉거리며 숙제하듯 책을 읽고 한자 익히기에 급급하게 두어 달을 지냈습니다. 어색하던 학인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낯익어 지는 가운데 채운샘이 공부하는 자세를 돌아보라고 하시네요. 늘 제 질문을 늘 가지고 살아라는 것인데 방향은 그쪽으로 향해보렵니다.
전체 4

  • 2021-04-20 16:22
    한글에서 쓰서 올렸더니 편집이 제대로 안되네요. 몇변 시도하다 안되서 걍 둡니다^^

  • 2021-04-20 17:15
    성인의 우환의식과 자비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을 닮아 상을 짓는 것도 사실은 그 관계성을 계속 의식하고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고요. 언제나 마음의 문제가 첫 번째로군요:)

  • 2021-04-20 19:28
    安, 易, 定이 함께 쓰인 것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간이하지 않은 일상, 난잡한 생각들이 편안하지 못한 신체와 연관될 수밖에 없겠더군요. 구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빙빙 도는 것도 편안하지가 않네요..! ㅋ;; 같이 이 편안하지 않음을 극복해보죠!

  • 2021-04-21 19:50
    정랑샘 후기 잘 읽었어요. 저도 이번 수업내내 편치못했는데요, 한자 단어 하나하나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할 것인지 늘 고민이고요~~갑자기 뜬금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좀 챙피하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