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2주차(5.15)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5-11 13:05
조회
107
 

‘니체로 읽는 문학’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분들과 새로운 조에서 세미나를 하니 새로운 재미가 있었는데요. 무엇보다도 스피커가 쉴 틈이 없어서, 발언을 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했습니다. 갈팡질망 긴가민가 왁자지껄 하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해석을 말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또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일은 정말 멋진 경험인 듯합니다. 정말 그 안에서 전에 없던 무언가가 생겨나는 느낌이 든달까요? 물론 나중에 요약해서 다시 말해보는 일은 언제나 진땀이 나지만요.

1교시 <우상의 황혼> 토론에서의 주된 논의는 ‘대체 감각에 예민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니체는 이성의 오류와 편견’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철학자들이 이성을 옹호하면서 비판해온 감각은 거짓이 아니라고도 말하죠. 니체의 친절한 설명에 여기까진 따라가 졌습니다. 하지만 그럼 이성에 전제된 오류가 아닌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는 건 뭘까요? 니체는 ‘감각의 증거를 더욱 예리하게 하고 무장시켜 감각에 대해 끝까지 생각하기를 배우는 만큼’ 우리는 실재성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럼 감각에 대해 끝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냥 지금 느껴지는 감각적 느낌에 충실하게 집중하는 것, “FEEL IT!”인 걸까요? 하지만 저는 니체가 말하는 실재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 말고 그냥 느껴’라는 방식으로는 접근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감각에 정직해진다는 일이 역설적이지만 ‘이성과 지성을 끝까지 밀어붙여 총동원하는 일’이 아니겠냐고 말해봤는데요.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성이라는 용어가 니체가 비판한 것과 다른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 사유가 맞는 것 같다, 감각을 긍정하고 끝까지 거기에 주의를 집중한다면 그것을 여전히 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성과 감각은 대립되느냐, 이성은 감각의 부분이 아니냐 등등.

만만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이는 대로조차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감각이 제시하는 증거는, 사물이 계속 변화하는 채로만 존재한다는 것, 단일성과 지속성은 없다는 것, 어떤 유사성과 패턴이 비슷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동반사적으로 무언가가 있고 실재한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이성의 작업이지만 굉장히 습관화된 반응적인 작용입니다. 감각정보들을 즉각적으로 실체화시키는 것. 감각을 왜곡하는 이 습성이 너무 뿌리 깊습니다. 그렇기에 이성의 이런 오류(거의 본능에 가까운)를 알아차리고 고쳐 생각하는 일, 변화만을 제시하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일련의 훈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성의 자동반사적 판단-왜곡 반응을 우선 멈추고, 보이는 것들을 보이는 대로 보면서 그것의 비-지속성과 비-동일성을 통찰하는 훈련. 저는 이 과정이 그저 느낌에 충실하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능동적 수행의 차원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수천 년, 어쩌면 수억 년을 지속해왔을 ‘유사한 것에서 동일성을 보는’ 오류가 그냥 깨질 리 없기 때문입니다. 니체처럼 자기를 몰아세우며 관찰하고 쓰고, 고쳐 쓰는(유고에 남긴 흔적) 일 없이는, 혹은 수많은 수행자들이 하고 있는 일 수행 없이는 그냥 되지 않지요. 지성이든 이성이든 영성이든 근성이든 인간의 지혜를 끝까지 밀어 붙이는 오랜 작업 없이는 가 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교시 <죄와 벌> 토론에서는 ‘대체 인간의 행위에 동기가 있는가’라는 이야기 주제가 기억에 남네요. 살인 후 오락가락하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가족에게 거금을 쾌척하고, 맹세와 비난을 뒤섞어가며 그렇게 가지 않겠다고 잡아뗐던 친구 라주미힌의 파티에 갑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죠. “실제로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온 것 뿐이야.” 인영샘이 인용해주신 문장을 보고 저는, 이것이 이 종잡을 수 없는 살인과 그 후의 행적을 쓰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 싶은 진실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도 생각났구요. 동기나 행위자나 의도나 목적은 다 의식의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입니다. 의식은 말하자면 해안가인 것 같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해석은 우글거리는 힘들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거기에서 부딪히고 부서져서 떠밀려온 흔적들이 의식에 떠오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너무나 오랫동안 반복한 습관이나 법, 규율, 인습 등의 또 다른 강력한 에 의해 매번 유사한 난파물이 떠밀려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의도, 의지, 목적이 행위를 좌우한다고 전도해서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인간의 이런 의식 아래의 차원, 의식의 차원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힘의지의 차원을 배우는 일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즉 힘에의 의지를 배우는 일의 윤리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저 내면에는 우리도 모르는 어둠 악, 심연, 동물성 등 의식으로 환원되지도 우리 노력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있다.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이 깊은 곳을 자각한 자는, 그것이 늘 자신과 함께함을 이해한 자는 자기 행동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저는 몇 주 전 강의에서 들었던 이 말이 자꾸만 생각납니다(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시아문~). 또 언젠가 들었던 원시 부족들의 이니시에이션과, 오디세우스의 난파의 체험이 기억납니다. 그런 모험을 겪고 돌아온 자만이 아버지 노릇을 하고 돼지를 치는 일상을 살 수 있다는 설명이 왠지 와 닿습니다. 심연을 아는 자와 그냥 남들이 요구하는 도덕에 맞게 자는 비교가 안 되지요.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를 읽으면서, 이렇게 인간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힘들의 전쟁터로 보는 자만이 훈련을 마음먹는다”고요. 이때의 훈련은 힘들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전능함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 안에서 어떤 힘들이 승리하게 할지, 지금 자신이 손발을 뻗을 수 있는 수준에서 무엇을 바꿔볼지를 묻고 고민해보고 해보는 작업은 가능하죠. 그건 우리가 하는 겁니다. 수처위주와 조고각하. 우리 발밑의 일들을 어떻게 어떻게 바꿔 갈지는 우리 자신의 일이니까요.

세미나를 하면서 저희는 모두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 같은 심리 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요. 이 정도면 실제로 죽여봤다 하는 의견도 있었고, 이게 바로 니체가 말한 '체계를 세우려는 의지'가 결여한 '성실성'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희가 그의 묘사에 놀란 것은 미친 사람이나 정신 착란을 잘 설명해줘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세한 감정 변화와 알 수 없는 충동들의 들쭉날쭉함이 우리 자신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자신 아닌 힘들로부터 저질러버린 이 현기증나는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도 선생님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새삼 너무 즐겁네요 ㅎㅎ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과제 & 공지]
  1. <우상의 황혼> 105~130쪽(인류를 ‘개선하는 자들’)까지 읽고 단편 하나 혹은 구절을 골라 한 페이지 정도 적어주세요.

  2. <죄와 벌> 3부, 4부 읽고 선과 악 혹은 힘에의 의지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고 싶은 구절 5개 골라오기

  3. 코멘트를 반영하여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두 번째 페이지 쓰기.

  4. 간식은 주영샘과 은옥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5. 승연샘의 후기가 올라와 있으니 나영샘조의 토론 내용은 거기서 확인해 주세요!

  6. 지각과 결석은 반장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시더라도 꼭 도반들이 모두 있는 단톡방에 알려주세요!

전체 1

  • 2021-05-12 22:53
    이 정도면 실제로 죽여봤다ㅋㅋㅋㅋㅋ 도박은 자기가 중독이라 그렇게 실감나게 썼다는데 살인은..ㅎㅎ 인간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일지 민호샘이 궁금해진 이유가 궁금합니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묘사가 유독 좋은 이유가 감정 변화나 충동을 공감되게끔 묘사해서는 아니었어요. 그런 작가들은 워낙 많기도 하고.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점, 그러나 분명 내 안에 있던 추잡함 같은 것을 저 밑바닥에서부터 끄집어낸다는 점? 이런 지저분한 감정까지도 무려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해낸다는 점? 책을 읽기 전에는 당연히 난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읽고 난 후에는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점? 이런 게 저에게는 도선생님만의 매력포인트였어요. 이거는 진짜 바닥까지 내려가보지 않은 사람은 쓸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되더라구요. 암튼 민호샘이 새삼 너무 즐겁다니 이유를 막론하고 흐뭇합니다.ㅎㅎ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문장은 아주 단순한 문장인데 생각해볼 문제가 많아요. 보이는 그대로 볼 수도 없고 기억의 문제와도 연관되니까요. 어렴풋한 기억과 태만으로 인해 꾸며내는 상상력 때문에 우리의 기억은 무엇인가를 같은 것으로 보고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친숙함에 대한 의지와도 관련이 있겠죠. 우리를 더이상 불안하게 하지 않게 만들려는 의지들. 그런데 '유사한 것에서 동일성을 보는 오류' 이게 생존본능이라고 니체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야 적과 비슷한 것을 적으로 인식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뭐 이런 맥락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그것과는 어떻게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예전에 건화샘이 뭐라뭐라 설명해줬던 것 같은데 기억나시면 알려주세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