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1주차 후기

작성자
승연
작성일
2021-05-09 14:54
조회
101
1주차 후기입니다. 1교시에는 ‘우상의 황혼’과 2교시에는 ‘죄와벌’ 세미나, 3교시에는 채운샘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편성도 새로 했는데요. 우리 2조는 나영 매니저님과 난희샘, 경희샘, 주영샘, 승현샘, 고은샘, 정아샘과 저 이렇게 8명이 한조가 되어 한 학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먼저 1교시에는 『우상의 황혼』을 읽고 단편 하나를 골라 해석해 와서 세미나를 했는데요. 가치평가와 가치전도, 철학에서의 이성, 소크라테스의 이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가치평가와 가치전도, 자신의 삶의 양식을 만든다는 문제를 니체를 비롯해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도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말은 알 듯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찌해야 할까? 또 공허하다고 느껴진다는 의견이었어요.  어떻게 니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생각과 취향’을 주제로 에세이를 쓸 계획이라는 난희샘의 말을 들으면서, 취향은 결국 뉘앙스, 자신의 윤리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견도 내 보았습니다. 좋은 취향이 있고 나쁜 취향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취향도 힘의지라는 사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죠. 가치 전도의 문제, 즉 뭔가 다르게 보려면 신체성, 즉  신체도 같이 가야한다는 것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삶의 가치가 평가될 수 없다는 말은 결국에는 우리가 심판자의 위치에 서려는 태도를 문제가 아닌가? 라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타자와의 불편함을 어떻게 니체적으로 풀어볼 수 있을까? ‘나’를 실체로 삼고, 그것을 원인으로 삼는 삶에 대해 니체는 비판하고 있는데요,.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 삶의 방식이 위험하게 느껴진다는 경희샘의 과제를 가지고 주체의 문제,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2교시에는 죄와벌 1~2부를 읽고 니체의 도덕(힘의지도 가능)의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고 싶은 구절 5개씩 골라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부분 샘들이 작품 속에서 인과관계가 구성이 안되는 사건들이 벌이지고 있고 이런 납득이 안되는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주인공을 한계에 밀어 넣는데, 그런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사건을 나열하면서 도스트예프스키가 보여주려는 게 뭘까?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후의 주인공의 행동 등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인가?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모비딕’을 읽었을때는 니체의 렌즈로 읽으면서 재미있었고 연결이 잘되는데요. 죄와벌은 어떻게 연결이 될까?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행위 자체가 이미 벌을 받는 과정이 아닌가? 무엇을 죄라고 할까? 어떤 사건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있는게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죄라면 죄가 다시 다르게 해석되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세미나  후 우리조의 질문은?  니체적 관점에서 어떻게 『죄와 벌』을 읽을까? 입니다.

3교시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는데요. 샘의 강의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니체와 도스트예프스키를 어떻게 연결시켜 읽어야 할까요?

채운샘은 니체와 도스트예프스키의 공통점을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니체는 도덕에 계보에서 ‘인간은 고통을 못견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못견디는 것은 고통의 무의미함이다’라고요. 인간에게 고통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의미화할 수 없을 때 못견딥니다.

감수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누군가와 마주침을 계기로 느껴지고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원리죠. 우리는 다른 것들과 만나서 마주침으로 변용이 일어납니다. 지금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매번의 호흡이 우리가 다르게 변용되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의미화할까요? 인간의 유한성, 실존의 문제 앞에서 질문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의 감수성으로 깨달음에 이른 대표적인 사람은 부처님이겠지요.

도스트예프스키는 고통에 민감합니다. 인간은 왜 이런 운명을 겪어야 하는가? 우리는 흔히 고통이 다가오면 없애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는 고통에 대한 자기 서사가 없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운샘은 좋은 삶이라는 것이 뭐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번뇌없이 사는  방법만 이야기를 하면서 번뇌없는 상태를 꿈꿉니다. 어떤 통증이 생기면 통증을 없애는데 총력을 다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부처님이 번뇌를 없애고 번뇌없이 사는 삶이 아닌, 번뇌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았잖아요.  번뇌는 마음의 통증입니다. 누구와 불편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못참아합니다. 불편한 것이 내가 원인일 수도 있고 상대가 원인일 수 있는데, 괴로워하면서 저주하고 불편함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자 합니다. 이게 망상이라고 하네요.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는 다양한 힘의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가 끌리는 것에 먹이를 주고 나를 구성하는 힘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죠. 문제는 거기서 윤리적 문제를 어떻게 던지느냐의 문제 입니다. 서로가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 갈 수 있을까? 만약 하나를 선과 악으로 나눈다면 악을 버려야 할까요? 그 선은 또다른 선과 악으로 나누어야 겠지요. 윤리는 어떻게 세상을 긍정과 평화, 선으로 가득채워 만들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는게 세상인데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어떻게 긍정할까의 문제라고 합니다.

隨處作主 수처작주 - 자기가 머무르는 곳을 따라 주인공이 되라!

照顧脚下 조고각하 - 자기의 발밑을 비춰서 숙고하라!

이번 학기 에세이 주제는 ‘내가 만난 니체’인데요. 코멘트에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은 자기 발밑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발밑의 번뇌가 세계의 번뇌고 우주의 번뇌입니다. 니체는 항상 감각과 이성을 말할 때 이성보다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각도 신체를 경유하는 것이고 신체는 우리가 느끼고 먹고 만나고 출발하는 출발점, 생생한 현존인 거죠. 거기서 우리의 공부는 출발해야 한다고 합니다. 문제 자체를 외부에 두고 출발하면 자기 언어로 풀리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에 예민하지 않으면 타인에게도 관심이 없는 법이죠, 내가 있는 곳에서 주인공이 된다는 말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네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 자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구성하고, 그곳에서 철학이 시작된다는 채운샘의 말씀입니다. 이상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전체 2

  • 2021-05-11 10:29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 삶의 방식이 위험하다는 토론을 하셨는데, 수처위주 조고각하라는 강의를 듣고 생각이 정리되셨을지가 궁금하네요!
    말로만 보면 얼핏 상충되는 것도 같아서요.
    모든 일에서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습관대로 익숙한 의견대로 사는 것=자신의 구체적인 번뇌(마음의 통증)을 못 보는 것=조고각하 하지 못하고 있음.
    이렇게 연결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학기 첫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승연샘!

  • 2021-05-12 23:04
    승연샘 오시자마자 역할 쏟아져서 바쁘셨죠?ㅎㅎ이게 다 기다렸던 마음의 표현임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요. 후기 읽으니깐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그동안 너무 감정의 영역 안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싶어요. 세심하고 감성이 넘칠 때 이게 감수성이 풍부한 것이라 했는데, 니체의 힘과 함께 생각할 때의 감수성은 변화의 능력, 수용 능력에다가 타자나 이질성 등등이 포함되어 훨씬 풍성한 단어가 되네요. 승연샘 늘 텍스트에 초초초집중하고 꼼꼼하게 읽은 뒤 하시는 질문을 들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글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