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 7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경숙
작성일
2020-12-07 14:03
조회
249
 

지난  시간에는 네그리의 <전복적 스피노자>에 대해 수업을 했습니다.  네그리, 푸코, 들뢰즈,  60년대 세사람의 철학자들이 "주체가 이런 이런 식으로 역사적으로 구성되는거다라는 출발점으로부터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는 다른 주체로 구성될 수있을까"를 고민한 세가지의 방식을 설명하셨습니다. 푸코는 내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품행이 인도되기를 거부할 것인가라는 자기조직의 문제를 계급적인 차원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의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사적인 것이 곧 바로 정치적이다. 결국 그 문제는 자기 구원의 문제다 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네그리는 사적인 방식으로 해방을 이룰 수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중과 더불어서 해방을 꿈꾸는 것 만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맑스적 비젼을 놓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다중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롯이 마이너한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언제나 도주의 문제 해방의 문제는 소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이 소수적이라는 말은 집합적인 것에 속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들뢰즈는 노동자 계급이 자율적 주체성을 조직할 수 있는 주요한 임무를 답지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시고 네그리를 독해해 보면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에게서 역량개념이 독특한것은 포테스타스로서의 역량이 아니라 포텐샤라는 차원을 함께 사유하는 것입니다. 네그리의 고민도 " 포텐샤의 역량이라는게 뭘까"입니다. 맑스적인 의미의 존재론은 "모든 개인은 이미 사회적이다"입니다. 그 사회적인 지평으로부터 주체는 구성됩니다. 노동자는 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산물일 수 밖에 없는가? 그런 점에서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아주 혁명적인 유물론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모든 개체들은 이미 그 개체가 형성되는 것의 조건으로서 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를 전제할 수 밖에 없는가? 이것이 네그리의 존재론적 지평입니다.

 

푸코에 의하면 우리는 인식의 차원이든 신체의 차원이든 선험적인 인식과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는게 아닙니다. 푸코는 '에피스테메'라는 담론의 공간을  경험적 가능성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그 '에피스테메'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봅니다.  즉 조건으로부터 개체의 발생을 봅니다. 그것이 들뢰즈에게는 '배치'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삶을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 사회입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어떤 정점도 없이 고정점도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너무 두렵습니다. 또한 우리는 소속되지 못하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 합니다.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앙티오디푸스>에서 욕망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너, 나, 엄마, 아빠, 어떤 것도 그 욕망이 잠시 머무르는 욕망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그냥 달아나! 도주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문제는 도주가 죽음의 선을 타는가, 생성의 선을 타는가입니다. 들뢰즈는 배치에 대한 분석없이 우리가 도주선을 만든다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푸코는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지지만 어떻게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진단'을 말합니다. '진단'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조건에 대한 분석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지금과 같은 우리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을 자율적으로 조직할 것인가? 결국 자율적 주체화, 능동적 주체화입니다. 역사적으로 구성된다고 하는 것과 그 조건 속에서 어떻게 예속적으로 주체화되기를 거부할것인가라는 이 두가지의 문제 사이에 역량의 문제가 있습니다.

 

네그리의 고민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이 노동자 계급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자율적으로 조직해 낼 것인가입니다. 이런 21세기의 조건 속에서 주체가 형성이 되는 측면은 포테스타스의 측면입니다. 그런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자기의 자율적 주체화를 이룰수 있을까가 포텐샤의 개념입니다. 들뢰즈도  배치를 신중하게 탐구해야 된다고 합니다. 한쪽으로는 기관없는 신체의 면에 있고 다른 한쪽은 이제 경화된 사회적 코드의 지평들의 면에 있습니다. 한쪽은 규정되지 않는 상태, 다른 한쪽은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 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장 속에서 지금 우리의 배치를 지배하고 있는 믿음들, 선들, 정서들, 이 모든 것들을 분석하는 만큼 도주로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 배치가 있는 것과 동시에 언제나 탈주선이 있습니다. 배치는 권력관계의 끊임없는 변화입니다. 이 배치 안에 반드시 빈틈이 있습니다. 이 끊임없이 작동중인 배치에 다른 힘들이  또 발생하면서 균열이 생깁니다.  이제 그런 지점으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끄집어내 보라고 합니다. 실험을 해야하는 지점입니다. 네그리가 말하는 역량이 들뢰즈의 차이 개념하고 통합니다. 권력이 작동하면서 발생시키는 차이, 어떻게 그런 차이들이 발생하는가. 역량은 그 관계의 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차이, 내가 누군가와 힘을 주고 받는 이 상호성 속에서 발휘되는 어떤 현실화되는 잠재성입니다.

 

글을 쓰실 때 역량의 문제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능동과 수동의 문제를 스피노자의 개념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수동은 결과이고 능동은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노자에게 능동과 수동은 항상 동시에  둘 다 원인입니다. 우리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이미 원인에 영향을 미치므로 상호인과인 동시에 원인입니다. 그동안 스피노자를 공부해 왔으니 각자의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어떤 지점에서 정치적일 수 있을까? 정치적이라는 말은 어떤 함축을 담고 있을까를 결론에서 도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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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7 17:40
    '진단'이라는 단어가 남네요. 네그리, 들뢰즈, 푸코의 공통점은 우리가 놓인 조건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는 것이었죠. 우리가 어떤 것들을 수동적으로 겪는지, 그로부터 능동적 활동을 함축하는 주체화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능동적 주체화, 진단 같은 키워드들이 왜 스피노자 철학에서 언급될 수밖에 없는지도 그들의 문제의식 속에서 함께 이해해야겠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다시 기본 개념들을 더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