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 9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12-11 21:04
조회
165
대망의 에세이까지 2주도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초고를 가지고 만나고, 그 다음 주에는 초고를 다듬는 시간을 가질 계획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생각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같이 끙끙대며 작업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분명 작년에도 올해와 같은 과정을 밟았는데 왠지 모르게 아주 새로웠습니다. 남은 기간 박차를 가하셔서 웃으며 에세이를 마무리 짓도록 하죠!

다음 주에는 화요일 밤 10시까지 초고를 미리 올려주세요. 양이 많은 만큼 미리 코멘트를 생각해서 서로의 글에 대한 코멘트를 최대한 많이 할 예정입니다. 간식은 정옥쌤, 후기는 영님쌤께 부탁드릴게요!

 

가끔 채운쌤이 《지성교정론》을 얘기해주셨는데, 이번에 들으면서 꼭 《지성교정론》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지성교정론》에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 명예, 정욕이 정말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인지를 질문합니다. 오늘(12월 11일) ‘문장을 훔치다’에 나온 스피노자는 그러한 가치에 대한 추구가 자신의 삶을 슬픔으로 인도할 것임을 ‘진단’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추구해야 할 가치[善]란 자신이 바라는 삶에 이르는 데 있어서 유용한 것입니다. 악(惡)이란 그러한 삶에 이르는 데 있어서 장애물입니다. 선악은 많은 사람들의 호오와 무관하게 자신이 목표한 삶에 이르는 여정에 유용한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돼야 하는 것이죠. 스피노자는 숙고 끝에 부, 명예, 정욕 같은 것이 자신을 살게 하는 ‘선’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악’이 될 수 있다는 데 이릅니다.
“꾸준히 성찰한 결과, 나는 결국 만일 내가 철저하게 숙고할 수만 있다면, 확실한 선을 위해 확실한 악들을 포기하는 셈이 되리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사실 나는 내가 최고의 위험에 빠져 있음을, 그리고 설령 불확실할지라도 부득불 온 힘을 다해 치유책을 찾아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받는 병자가 치유책을 쓰지 않을 경우 확실한 죽음이 예견될 때, 그의 모든 희망이 이 치유책에 놓여 있기에, 설령 불확실할지라도 부득불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찾아볼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 《지성교정론》中

“꾸준히 성찰”하여 “철저하게 숙고”했다는 판단에 이르기까지 성찰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얼마나 밟아야 할까요? 다시 말해, 이성적 인식이 기존의 부적합한 인식이 동반하는 정념보다 더 실재적이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여기에는 신체, 정서, 상상 등 그동안 폄하되었던 것들에 대한 재평가가 포함됩니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가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의 권위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뤄져야 합니다. 가령, 니체의 주장이 요약된 “너의 충동에 따라 살아라”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쩐지 되는 대로 막 사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막 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만큼 충동에 따라 사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성 또한 충동에 속하는 니체에게 이성을 따라 사는 것이란 충동에 따라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반응에는 충동에 대한, 나아가 신체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신·폄하가 포함돼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의지·폄하해왔던 것들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로운지 혹은 해로운지를 매번 성찰·숙고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그리고 철저하게 성찰·숙고했다는 스피노자의 말에는 어쩐지 힘이 드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인식의 기쁨이 우리를 스스로 이성적으로 살게끔 추동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인식의 기쁨이 여전히 기존의 습관을 따르는 기쁨보다 미약합니다. 고대 중국의 텍스트 중 《서경》 〈대우모〉편에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미약하다. 오로지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진실로 그 중도를 붙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厥執中)”는 말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거의 모든 순간 위태로운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언젠가 이성이 무적이 되는 문턱을 넘은 것을 상정하기보다 마음이 언제든 부, 명예, 정욕 같은 외부적인 가치에 쉽게 휘둘린다는 걸 염두에 두는 게 더 유용한 인식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잠깐 인식의 기쁨을 느꼈다가 다시 금방 기존의 습관적 기쁨으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해소되지 않는 아포리아를 안고 갈 수밖에 없듯이, 제가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 역시 아포리아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인식하려는 노력에도, 마트롱이 말했듯, ‘마치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보조하는 환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트롱이 말하는 환경이란 제도이긴 하지만, 이때 제도는 단순히 GDP 같은 경제적 지표에 근거해서 수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트롱은 군주정, 귀족정의 정체들을 분석하면서 굳건함과 도의심의 발생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제도를 수립할 때조차 그것이 어떤 정서적 효과를 창출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그리도 마트롱과 비슷하게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를 이해합니다. 그는 《전복적 스피노자》 〈3장 미완의 여백, 후기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개념 정의〉에서 ‘도의심(pietas)’에 주목합니다. 네그리가 파악한 스피노자가 구상한 민주주의적 사회의 핵심은 상호 간에 도의심으로 촉발되는 관계의 확장입니다.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즉 ‘전적으로 절대적인 민주주의적 통치’는 다중적 과정(le processus de masse) 속에서 서로 교차하는 특이성들의 사회적 실천으로, 좀더 적절히 말해서, 다중을 구성하는 주체들의 다수성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개인적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구성하는 도의심(pietas)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96쪽

이번에 네그리의 텍스트를 다시 읽으니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더군요. 그 중 ‘도의심’을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핵심 정서로 파악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채운쌤은 도의심을 불교의 자비와 연관 지어서 얘기해주셨습니다. 이때 자비란 단순히 우리가 불쌍하다고 느끼는 연민과 다릅니다. 심지어 조두순 같은 사회적 악인들에 대해서도 베풀 수 있는 것이 불교가 말하는 자비입니다. 대략 제가 이해한 불교의 자비란, 업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인데, 이때의 안타까움은 인간이 살아가는 지평에 대한 이해를 동반합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선악을 넘어서서 관계 맺을 수 있는 역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그리가 주목한 ‘전적으로 절대적인 민주주의적 통치’를 작동시키는 정서로서의 도의심도 선악을 뛰어넘는 불교의 자비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주체도 보편성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더구나 보편성을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주체들을 관통하는 이성의 기획으로 삼음으로써 우리는 힘을 지니게 된다. 반대로 개별적인 것을 사랑하면서 오직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는 힘을 지니지 못하며, 오히려 전적으로 무력해진다.”(네그리, 98쪽)

이번에 네그리 읽으면서 뒷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 여러 번 들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기쁨으로 촉발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잘 이해가 안 되는 구절들이 아직 많지만, 곱씹게 되는 구절들도 많았습니다. 민주주의란 것이 단순히 나 좋고, 너 좋다는 식의 모두가 화목한 사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보편에 대한 사랑을 빼놓을 수도 없습니다. 아마 네그리가 말한 보편이 공통개념 같은 것들이겠죠. 결국에는 다시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잘 모르면서 글이 어렵다(+번역 탓이다!)는 식으로 대충 읽은 감이 없지 않은데 ^^;;, 이참에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뜨겁게 자기 고민 속에서 스피노자와 만난 사람이 몇이나 될지 반성하게 됐습니다...! 뜨겁게 스피노자와 만나기 위해, 네그리의 절실한 문제의식을 다시 따라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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