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1학기 4주차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1-03-12 21:58
조회
131
오래 만난 벗은 오래 보아서 좋고, 새롭게 만난 벗은 새로워서 좋습니다. 아침부터 집을 나서 비행기와 지하철,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오셨을 진아샘과 꿋꿋하고 진중하게 자리를 채우시면서도 동기가 옆에 없어서 외로웠다고 귀여운 투정을 하시는 정희샘, 우리 올드 멤버들 그리고 한층 밝은 목소리로 우릴 안심시키신 여전히 병과 건강에 대한 새로운 용법을 실험중이신 울 샘까지... 모두 모이니 더 좋았습니다. 정희샘과 진아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배치는 역동성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처음 스피노자를 만났던 기억을 소환시키며 자신을 돌아보게도 하고, 익숙하다는 핑계로 당연시했던 지점들을 다시 사유하게 하는 자극을 선사하십니다. 물론 두 분이 겪고 계실 당혹스러움 답답함 등등... 충분히 헤아려지지만^^ 그 조심스러운 신중함과 겸손함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두 분의 호기심과 열정 덕분에 다시 새롭게 에티카를 읽고 다르게 스피노자를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오랜 벗들과 스승님께도 감사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왠지 쑥스럽지만 말입니다.^^

스피노자와 친구들, 그 친구들 중 한 명인 라이프니츠를 너무 건성으로 만나고 있던 저로서는 샘의 강의를 듣고서야 정신을 좀 차립니다. 한 명의 철학자를 만난다는 것, 한 권의 텍스트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에티튜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심판관이나 평가자의 자세 속에서 이미 형성된 선판단만으로 또는 이분화된 비교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읽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로소 라이프니츠를 만날 준비가 된 듯합니다. 한 시대 사유의 동일한 진동,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중세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개념들을 어떻게 과학적 지평에서 다시 사유할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능동적으로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라이프니츠도 그 시대 지평 안에서 신과 개체, 이 현실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의 지성으로 설명해내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고 있었는지를... 이제야 느끼게 됩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를 17세기 당대 두 명의 화가인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에 빗대어서 비유하는 들뢰즈의 설명은 참 흥미롭습니다. 이 두 명의 화가는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의 두 가지 방식, 빛을 사용하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줍니다. 빛이 공간을 만들어내는 용법의 차이, 빛과 어둠의 관계를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가 둘 사이에는 두드러집니다. 베르메르는 정오에 빛이 만물에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색채들로 가득한 그림을 그립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에는 어둠이 거의 없습니다. 그림자조차도 자기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는 세계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둠은 빛이 만들어낸 또 다른 효과일 뿐입니다. 반면에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색채가 없습니다. 어둠으로부터 형상이 나옵니다. 그 형상이 어둠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어둠으로부터 빛의 유희를 만들어냅니다. 즉 빛조차도 어둠으로부터 생성되는 형상입니다. 베르메르가 명암의 관계를 색과 색의 상보와 대비의 관계로 바꾸면서 명암의 전통과 용감하게 맞섰다면, 렘브란트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립 속에서 어둠과 빛이 서로를 강조해주는 방식으로 새롭게 관계를 이루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세계가 베르메르와 같은 빛의 세계라면,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렘브란트처럼 어둠으로부터 빛이 나오는 세계라고 비유를 합니다. 스피노자가 비잔틴 미술에 가깝다면 라이프니츠는 바로크적 영감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바로크’라는 말은 울퉁불퉁하고 불규칙적인 것을 뜻합니다. 르네상스가 조화 균형 절제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바로크는 그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어딘가는 지나치게 밝고 어딘가는 지나치게 어두운 방식으로 과장되게 표현됩니다. 바로크 시대 그림들의 치마 주름들을 상상해보거나 바로크 건축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공간의 안과 밖이 매칭이 안 되는 형태로 곧 공간의 바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 안쪽에 숨어있는 형태로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다이내믹한 빛의 효과로 공간이 비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을 연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샘께서는 들뢰즈가 바로크적인 것을 라이프니츠와 연관시킨 것은 바로크적인 예술이 그의 사유방식과 닮아있다고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스피노자가 자기가 전제로 하는 테마에서 시작해서 엄밀하게 논증을 해나간다면, 라이프니츠는 기존의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끌어내기 때문에 사유 자체가 스피노자만큼 일관적이지 않고 비균질적이고 불규칙적이라고 할까요.

비잔틴 미술에 가까운 스피노자의 세계는 모자이크 조각처럼 낱낱의 유리조각들이 자기 스스로 빛과의 관계 속에서 남김없이 펼쳐지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어둠에서 빛이 생성되는 바로크 미술을 샘은 종이접기에 비유해서 설명하셨는데요, 한 장의 종이로 종이학, 배, 비행기 등 어떤 형상도 접을 수 있듯이 접히고 펼쳐지는 형상은 다 다르지만 그 다른 형상을 통해서 종이는 남김없이 자기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과 양태의 관계로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의 지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주요한 특징을 이루던 17세기 철학적 지평 속에서 두 사람은 신을 어떻게 지성을 통해서 이해할 것인가라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물론 종교에 대한 맹목을 비판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다른 견해를 가집니다. 스피노자가 이성과 신앙을 분리해야 된다고 보았다면, 라이프니츠는 신앙을 이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둘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를 사유합니다. 또한 신체와 정신 간에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봄으로써 둘 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넘어서지만 신체와 정신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차이를 보여줍니다.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을 동시적 관계로 이해했다면 라이프니츠는 둘 사이를 표현관계 예를 들어 땅과 그것을 나타내는 지도의 관계처럼 이해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행위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은 17세기나 지금이나 여전히 주요한 문제의식입니다. 그 원인의 자리에 17세기에는 신을 놓았다면 지금은 무엇을 놓을까가 다를 뿐입니다. 여전히 신을 또는 자본을 또는 뇌의 작용을 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와 판단의 원인을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적 지평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내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이 지평 외에 바깥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신을 완벽하게 내재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스피노자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절충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럴 때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신의 의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신의 지성에 따라서 창조했다는 독특한 관점을 제기합니다. 스피노자가 신 즉 자연이라면 라이프니츠는 신 즉 지성, 신이란 지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의 세계는 신의 지성 안에 있는 영역, 가능세계들의 영역입니다. 성경에서처럼 신이 이 세계를 만들어놓고 좋다고 얘기한 것은 건축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료로 자기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만들 듯이(다른 재료가 있다면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듯이), 신의 지성 속에서 신은 다른 세계도 만들 수 있지만 지금 자기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은 모든 것들을 다 사유할 수 있고 신의 지성 속에는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를 현실화한 것이지 그 세계가 완전하고 유일무이한 세계인 것은 아닙니다. 건축가가 있는 재료를 갖고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다는 의미로 좋다고 한 것처럼 신이 만들어놓은 이 세계는 유일무이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최선의 세계입니다. 라이프니츠의 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그런 자의적인 의지를 가진 신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게 최선이기 때문에, 이것밖에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도 선악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악은 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계 자체는 악이 존재하지 않지만 피조물들은 실존 자체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입각해서 어떤 것을 악이라고 관념을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악은 선과 대립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을 결여한 상대적인 것으로 선악은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이 아니고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파악하는 관념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성을 통해서 이 세계가 신의 엄밀한 지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자기가 관념으로부터 만들어놓은 악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라이프니츠는 설명합니다.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와 연관시키는 보르헤스의 단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한때 저를 매료시킨 소설이기도 했었는데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나의 길을 선택하면서 나아가겠지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가지 않은 길들이 잠재적 차원에 항상 공존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의 삶을 현실화하더라도 우리 삶에는 늘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삶도 주름 잡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주름이라는 용어를 빌리자면 이 주름들을 얼마나 더 다양하게 펼쳐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더 신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에게 최선이 인간에게도 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인간은 유한한 실존 속에서 자신의 관념을 가지고 겪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윤리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고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사유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물질이 아니라 영혼에 가까운 것으로 정의합니다. 샘은 모든 개체의 본질에 내재해 있는 신적인 어떤 것으로 표현하셨는데요, 우리는 하나의 개체성으로 태어나지만 그 개체 안에는 이미 전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 문득 ‘가장 낮은 단계에서조차 정신적 우주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교유에 대한 거대한 열망’이라고 했던 마트롱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개체적 실체 즉 모나드는 신이 부여한 하나의 세계를 다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신과 개체 사이의 위계 관계가 설정되는 창조론과는 다른 개념이 됩니다. 샘은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은 주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라이프니츠의 신, 실체 개념, 가능세계 개념 등 아직 명료하지 않은 개념들은 모나드론 등 계속 읽어나가면서 다시 개념들을 정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가 자유와 자유의지를 어떤 용법으로 쓰고 있는지, 신과 모나드 개념 등은 어떤 윤리적 함축을 견지하고 있는지 등 아직까진 막연하지만 이제 찬찬히 더 깊게 라이프니츠의 세계로 진입해봐야겠습니다.
전체 2

  • 2021-03-13 13:01
    모나드를 마트롱의 '모든 개체에는 교유에 대한 거대한 열망'이 잠재돼있다는 얘기와 연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일단 모나드는 '창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라이프니츠를 너무 쉽게 읽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피노자에 비해 만만하게 본 것도 사실이고...(흠흠, 부끄럽군요.) 어쨌든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다시 스피노자를 풍성하게 만나는 길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 2021-03-17 09:21
    와우... 스피노자 팀의 공부가 넓고 깊어지는 게 보입니다...! 라이프니츠 공부와 더불어 스피노자의 철학이 놓인 큰 그림을 보고 계신듯...! 다음학기 서양기초반에서 현정샘과 함께 스피노자를 공부할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레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