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2 여섯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9-09-25 16:32
조회
104
“사물로서의 국가에 대해 그것이 자기를 출발점으로 해 발달하는 존재, 자발적인 장치를 통해 마치 자동적으로 개인에게 부과되는 존재인 것처럼 논의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실천입니다. 국가는 실천의 총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총체적 실천이 국가를 통치의 방식, 행동방식, 통치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안전, 영토, 인구>, p.384)

푸코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특정 개념의 정의나 의미를 따지기보다, 개념이 수반하는 '실천' 내지 ‘효과’에 주목한다는 점이 눈에 띨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푸코는 국가를 말할 때 그것의 기원이 원래부터 존재해왔고, 그것이 이렇게 저렇게 발달하고 변모해왔던 실체였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말하면서 ‘국가란 이러저러하다’고 정의하는 것은 개념의 실체를 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실체라는 것을 ‘본질’이라는 말로 바꿔 이해해도 됩니다. 말하자면 푸코는 어떤 개념을 쓸 때 그것을 지시하는 본질적인 의미 같은 것을 따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국가를 A로 정의하든, B로 설명하든 그것 자체가 중요하진 않게 됩니다. 푸코는 다만 우리가 국가라고 일컫는 개념이 원래부터 있어왔던 ‘실체’로 우리에게 출현될 때, 그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눈여겨볼 뿐입니다. 최근에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널리 쓰입니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통용될 때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불러올까요? 동물의 권리에 대한 관심과 함께 특정 동물을 식용하는 문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많아지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족처럼 여기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동물에게 옷을 입히고 염색을 하고, 씻기고, 먹이는데 필요한 각종 애완 상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길거리와 공원 주변에 반려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수칙들(위생적인 차원과 관련된)이 표지판을 통해 공지된다는 것. 동물을 양육하고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 언젠가 ‘반려동물 등록제’가 시행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애완동물이 정말 가족의 일부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사람처럼 본격적으로 ‘관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효과’란 어떤 개념이 수반하는 구체적 실천 양상을 가리킵니다.

푸코가 권력을 사유하는 방식도 권력이라는 개념이 가져오는 ‘효과’에 집중합니다. 말하자면 푸코는 이 세상에 권력을 행사하는 수뇌부가 원래부터 따로 있다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권력을 새롭게 사유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권력은 억압을 통해 작동한다고 이해합니다. ‘~하면 안 된다’는 식의 ‘금지’를 통해 권력이 작동한다고 믿습니다. 푸코는 이 지점이 우리가 권력에 대해 흔히 오해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합니다. 권력은 금지라기보다는 엄연히 말해 우리의 행위양식을 특정하게 ‘인도’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물론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 것을 행사하는 명령 또한 (우리가 그 음식을 먹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면 그것도 권력 작용입니다. 그런데 푸코가 권력을 사유한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과 권유 또한 권력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음식을 먹는 우리들조차 권력 작용을 실현시키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에서 사회의 곳곳에서 개별적으로(미시적으로) 동시에 전체적으로(거시적으로) 작동되는 권력 양상을 역사적으로 포착합니다. 중세 서구 사회의 사목 권력에서 목자는 자신이 돌봐야할 전체 양떼만큼, 한 마리 양을 돌보는 일에 신경을 씁니다. 이때 돌본다는 말을 ‘관리’한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습니다. 국가이성이 출현한 이후의 정치는 국부를 증대할 수 있는 자원인 ‘인구’를 본격적으로 문제화하면서 외교적인 동맹 체계와 군사조직을 통한 내치police를 실행합니다. 근대 이후의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이익과 손해를 가늠하는 지표에 따라서 영토 내에 있는 인구의 변동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인구 비율을 일정하게 조정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행사합니다. 그런데 푸코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통치술은 좀 달랐습니다. 이 시기에 통치 자체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로마인들에게 통치가 발휘되는 과정에 국가이성이 관여하지 않았고, 통치는 교회와 같은 심급이 자신의 문제보다 우선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의 욕망과 관계 맺을 것인가가 그들의 삶에 중요한 고민이었습니다.

푸코의 후기 연구는 ‘고행’, ‘자기수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스케시스’ ἄσκησις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의 삶은 자기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 외부적인 기준에 의존하지 않는 진실(욕망)을 생산하는 훈련을 주요 과제로 삼았습니다. ‘자신을 통치하는 자만이 타인을 통치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기예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유한 품행을 발명하게 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만연한 상품문화의 위력을 절감했던 이반 일리치는 푸코식으로 말하면 ‘대항품행’을 발명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학자였습니다. 일리치는 이전에 없던 필요를 계속적으로 만들어내고, 배움의 기회를 독점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과 새롭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제도적 장치에 의존하게 될수록, 우리 스스로가 자생적인 삶의 기예를 발명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학교 없는 사회>에서 그는 우리의 배움이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오늘날 교육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일련의 절차에 따라서 획득되고 있다는 믿음을 양산해내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그것은 단지 학교제도를 개혁해야한다는 논의를 넘어서, 우리의 삶이 제도적 가치에 따라 인도되고 있음에 대한 근본적인 경고입니다. 우리가 공기처럼 자명하게 여기는 이 시대의 앎은 우리를 어떠한 방식의 삶을 실천하게끔 인도할까요? 다른 삶의 양식을 발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이 푸코와 일리치의 문제의식을 교차시키면서 고민해볼만한 지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학교 없는 사회>를 읽어옵니다.

각자 발제 맡은 챕터를 반 페이지로 정리하고, 책과 나의 현실을 접목한 글을 한 페이지 내로 써봅니다.
나의 경험도 좋고, 사회적 이슈로 접한 사례도 좋습니다. 간식은 지영샘과 보은샘이 맡아주셨습니다.
전체 1

  • 2019-09-26 21:09
    대항 품행계의 대선배님 푸코님과 일리치님의 케미에 두근두근했던 강의 시간이 새록새록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