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3 세 번째 시간(1.21)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1-22 21:45
조회
195
이번 주에는 독일에서 돌아오신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는 우선 돌아가면서 질문을 쭉 받고 질문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진실진술의 체제’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요. 그와 함께 푸코의 문제의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또한 생각할 기회가 되어 초반에 저희가 겪었던 막막함을 조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후기에서는 강의에서 배운 1)푸코의 진실체제 분석으로서의 역사 연구 2)통치성의 개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사진 찍는 것을 깜빡해서 카리스마 넘치는 푸코의 사진들로 대체해봅니다.)


우선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강의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이 강의는 푸코의 강의 중 현대적인 정치의 문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다룬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신자유주의 분석에 물고를 튼 연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분석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기계발’이라는 문제설정 하에 행해진 여러 담론들 속에서 인간의 가치가 ‘인적자본’으로 간주되고 활용되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한 마디로 인구로서의 생명을 관리하는 통치 테크닉은 어떤 담론이나 메커니즘과 함께 탄생했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이 같은 현재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현재를 빠져나가 과거로 갑니다. 원래 어땠는가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문제의식 속에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생명정치가 탄생하는 지평에는 18세기 중반에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전과는 다른 선을 그리는 새로운 통치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변곡점을 중심으로 연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푸코의 연구주제는 보통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진리(혹은 진실), 권력, 주체가 그것입니다. 시기별 혹은 저작별로 구분된다고 하지만 푸코는 시종일관 자신이 천착한 주제는 주체의 문제였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읽을수록 그 세 가지가 나눠질 수 없고 함께 이야기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느끼고,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 판단, 행위의 과정은 아무리 자의적이고 무의식적인 수준이라 하더라도 전제하고 참조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참·거짓의 체제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가령 사람이라면 더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본성’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 앞가림은 해야 한다, 즉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는 이러한 당연한 ‘도리’를 생각해볼 수 있지요. 혹은 뉴스 기사를 훑을 때 드러나는 우리의 수많은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푸코는 바로 이 지점, 이 ‘당연함’들을 문제화합니다. 너무 당연해서 물어볼 가치도 없는 이러한 우리의 자연스러움들, 지혜로움/무지함, 아름다움/추함, 정상/비정상, 건강/불건강 등의 참/거짓의 체제(니체 식으로 말하면 바로 ‘도덕’)는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요? 다시 말해 ‘진실의 체제’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요? 이것은 무엇이 진짜인가를 밝히는 진리 탐구나 팩트 체크가 아닙니다. 푸코는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진 ‘하나의 진리 찾기’ 철학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푸코의 연구 기획은 스스로 밝히듯이 “진실의 역사나 착오의 역사,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아니라 진실진술 체제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65쪽)


푸코에게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진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성, 인권, 노동 등의 영역에서 마땅함을 획득하고 있는 앎이나 올바른 태도 등은 특정한 담론적·비담론적 배치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진실을 진실이게 하는 특정한 체제 속에서 그것은 진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푸코는 진실 체제 혹은 진실진술의 체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한 담론과 관련해 어떤 언표들이 이 담론에서 참 혹은 거짓으로서 특징지어질 수 있는지를 확정할 수 있게 해주는 규율의 총체입니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65쪽) 여기서의 규율은 어떤 담론을 형성하고 그 담론이 참조하고 있는 일련의 사물, 사건, 테크닉과 같이 우리 몸과 마음에 작용하는 실천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들이 가지는 메커니즘의 총체를 권력의 작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때의 권력이 억압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정한 진실의 토대 위에서 느끼고,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은 주체인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의 근거로서 진실체제를 형성하는 차원의 실천들, 즉 행위양식을 인도하는 힘관계가 바로 권력입니다. 때문에 진실, 권력, 주체의 문제는 서로 떼어놓고 이야기 될 수 없습니다. ‘진실 체제’라는 개념에는 이 셋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진실 체제의 역사는 어떻게 연구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의 당연함이 어째서 당연한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당연함부터, 취향을 존중하고 매너를 지켜야 한다는 자명한 진실들을 되물을 구석이 없지요. 심지어 그것들이 특정한 체제 위에 있다는 사실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현상을 분석하기를 바란다면, 그저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을 서로 연관시켜서 그 절차를 인지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겠죠. 그런 절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문제입니다.”(같은 책, 62쪽) 인지가능성의 창출. 푸코는 현재를 인지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의 분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기’를 시도합니다. 여기서 바깥은 바로 과거입니다. 현재의 당연함을 되묻기 위해 역사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 같은 역사 분석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진실을 발견하거나 현재를 심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진실 체제를 인지가능하게 만들기, 즉 “진실되기도 하고 그릇되기도 한 어떤 종류의 규칙들에 따르는 일정 유형의 정식화가 어떤 조건 아래에서, 그리고 어떤 효과를 수반하며 행해지게 되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일입니다.”(같은 책, 66쪽) 가령 오늘날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19세기 의사들 혹은 학자들에게 진실되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체제를 한정하고 가시화하는 일. 바로 그럴 때 우리는 현재를 당연하게 보지 않을 가능성을 가집니다. 채운샘은 이것이 푸코의 현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사안을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들을 낯설게 만들고,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주체가 어떤 배치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는가를 분석하고 이해할 때,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지 않을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여백을 발견하게 하고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다른 양식을 만들도록 생각하고 싸우게 하는 것이지요. 과거를 탐구함으로부터 현재를 입체화하는 것은 일리치와 매우 유사합니다. 일리치가 학교, 병원, 교통 등의 필요에 대해 말할 때, 제도와 전문가들의 사회의 의존에 대해 말할 때 시도하고 있는 방식은 푸코의 방법론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진실의 체제로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분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것은 푸코가 만든 개념으로, 일방적인 억압으로 행해지는 느낌을 주는 권력이라는 용어를 대안해, 우리의 멘탈과 심신에 작동해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 일련의 힘관계의 작동방식을 말합니다. 통치술이란 그것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테크놀로지입니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테크닉들과 장치들을 수반하며 우리가 이렇게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스스로 원하도록 하는 권력의 행사방식이 통치성인 것이지요. 우리는 갑자기 학생이 되지 않습니다. 시험, 벌점, 교복, 생활기록부, 학부모 면담, 교가 등의 구체적 장치와 테크닉들로 인해 우리는 학교가 원하는 학생이 됩니다. 노동자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임금은 물론이고, 인센티브, 회사의 명성, 건물의 쾌적함, 사내 괴롭힘방지법과 같은 복지 등 일련의 테크닉들과 더불어 회사가 원하는 회사원이 됩니다. 통치는 바로 이렇게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조작들과 함께 작동합니다. 미디어, 교육, 말, 훈육 등에서 만들어지는 정상/비정상의 기준도 마찬가지이지요. 즉 어떻게 한 주체를 이렇게가 아니라 저렇게 행동하도록 하는가 하는 기술들에 대한 분석이 통치성 연구에서는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오직 지배권력과 피지배권력의 대립 속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맑시즘과 같은 연구에서는 그러한 실천의 차원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주체의 형성의 차원을 문제 삼지 않고서 권력을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기 때문에 맑시즘은 자분주의를 분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치는 일련의 기술과 근거들을 구성하고 그것들을 수반하면서 개체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 모두에 행해집니다. 일종의 합리성을 가지고 이뤄지는 것이지요. 통치는 단순한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집단과 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구체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실천입니다.


18세기 중반에 들어 통치성의 변곡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국가가 최대한 많은 역할을 할 것인가?’가 문제되었던 이전과 달리 ‘어떻게 국가가 최대한 적은 역할을 할 것인가?’가 문제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통치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통치 자신의 번영을 위해 훨씬 합리적인 것이 된 것이지요. 그러한 변화는 정치경제학의 발달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푸코가 “한 사회에서의 권력들의 조직화와 배분, 제한에 관한 일반적인 고찰”(같은 책, 37쪽)이라고 이야기하는 정치경제학은 통치의 자기조정을 가능케 하는 지적 도구입니다. 경제뿐 아니라 부의 생산과 분배의 문제 전반에 관여하는 정치경제학은 국가의 예산의 활용을 위해 노동인구를 연구하고, 인구의 편재, 청년과 노인의 비율, 출생과 사망의 비율 전체를 조사해 그것들을 정치적인 사안으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 어떤 통치가 합리적인가에 있어서 최소비용의 최대효과라는 효율의 원칙, 이해관계라는 경제적 원칙이 정치에서의 중요한 참조 사안, 아니 정치의 거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정책이 옳고 그른가를 결정하는 진실의 체제가 바로 정치경제학인 것이지요. 이것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해관계의 차원에서 득실을 따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우리 개개인의 양상이기도 합니다. 이해관계가 우리의 현실성이 된 거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사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이해관계에 따른 진실 체제가 서서히 변화되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 이상 많은 돈과 많은 이득이 우리에게 충만함을 주지 못합니다. 이상하게도 열심히 돈을 벌어서 찾는 것은 마음수련, 정신과, 심리치료사, 명상센터, ‘괜찮아’ 담론 책들입니다. 마크 피셔가 말했듯이, “그토록 많은 사람,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들이 아프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 체제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 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42쪽) 정치경제학이 제시하는 이해관계에 다른 행동양식은 아직도 건재하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고장 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정치경제학적 진실 체제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느끼고 새로운 진실 체제를 맞이할 가장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또 다른 전문가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 또는 대단한 철학자들, 새로운 복지제도 등에 맡겨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복적인 위탁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진단하고 공부해서 우리 진실의 주체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필요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될 것인가를 물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럼 횡설수설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설 연휴 따뜻하게 보내시고, 다다음주(2월 4일)에 뵙겠습니다. 간식은 난희샘과 영아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체 4

  • 2020-01-23 00:23
    버스 막차 시간 때문에 끝나기 전에 나와 아쉬웠는데 민호 선생님 덕분에 뒷부분도 볼 수 있네요. 고맙습니다.
    강의 듣고 오늘도 일하는 중간 중간 진실체제와 품행,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문득 자본의 통치술에 의해 프로그램된 사회를 지속적으로(태어난 바탕 위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역시 권력의 억압적인 측면이 아닌가 생각해서, 채운 선생님 말씀을 계속 곱씹고 있습니다. 역시 어렵습니다.
    다음 만남에서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건가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20-01-23 13:19
      안녕하세요 송송이 선생님! 앞으로 세미나를 하면서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2월 4일)에는 <그림자 노동>을 3장까지(~132쪽) 읽고 지난번과 같은 형식의 글을 써 오시면 됩니다. 일리치의 개념이나 사유를 소화하고 해석하면서 그것을 렌즈로 삼아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낯선 방식으로 문제화하는 글을 써 오시면 돼요~ 그럼 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 2020-01-23 15:37
    민호샘, 빠르고 상세한 후기 고맙고맙!ㅎㅎ
    강의를 들으면서,《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읽는데 급급해 말고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머리속에 넣고 읽자 라고 맘을 먹고 정리해보려는데 어렵군요 ㅠ.ㅠ
    "18세기 중엽 중요한 변형, 즉 그 시대 담론과 권력관계에 의해 자유주의라는 진실체제가 생산된다. 새롭게 형성된 이 진실체제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어떻게 느끼고, 판단하고, 행위하도록 (어떤 일정한 실천들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나아가 담론과 권력관계에 의해 생산된 진실체제에 인도되지 않고 내가 진실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공부하고 실험해보자." 요렇게라도 정리하고 쭉~읽으면서 살을 붙여보려구요. ^^;;
    어렵지만, 함께 화이팅해요!

  • 2020-01-28 23:00
    민호샘은 이 후기를 쓰느라 명절에도 공부했겠다, 생각했어요. 제가 정리하고 싶었던 내용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어 있어서 푸짐하게 얻어가는 기분이예요. 수고 많으셨어요. 민호샘~~
    채운쌤의 강의를 듣고 생명관리정치를 읽으니 비로소 맥락이 잡히네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를 묻는 것은 어쩌면 쉬운 질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 방식자체가 기존의 '진실체계'를 제생산해내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푸코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점은 푸코식의 질문 방식 자체를 끝가지 놓치지 않고 체화하기, 이게 관건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이게 공부를 할 때는 좀 되는가 싶은데 , 이번 명절만 해도 저는 푹 늘어져서 아무 생각이 없었답니다.
    민호샘의 후기를 읽으니 다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