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두 번째 시간(1.14) 후기입니다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20-01-20 17:12
조회
110
2주차 비기너스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전문가들의 사회>를 읽고 토론했습니다. 그전에 인원이 늘기도 했고 좀 더 쫀쫀한 세미나를 하기 위해, 이번 주 부터 건화와 민호 두 조로 나눠서 이야기 했습니다. 조별 세미나 후 나누기 할 때 보니, 일리치가 현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와 우리 문제를 일리치적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토론했던 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먼저 저희(건화조)에서는 공통과제 중 ‘일리치에게 전문가를 비판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구절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우선 비판이라고 하면 단순히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부정하는 보편적 의미로 이해될 여지가 크다는 의견이 있었는데요, 비판이라는 표현보다 분석이라는 말로 바꾸거나 아니면 비판의 다른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립해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죠. 이에 대해 글쓴이가 일리치의 접근법을 비판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푸코적 의미의 비판에 가깝다는 설명을 덧붙여주었습니다. 덕분에 비판의 새로운 용법과 일리치가 현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좀 더 알 수 있었습니다.
일리치가 20세기를 ‘전문가들의 시대’라고 말하며 전문가를 문제 삼을 때 제가 가장 헷갈렸던 지점이기도 한데요, 처음에는 저도 일리치가 분석한 전문가의 역할이란 게 그들로 인한 부정적 효과와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가령 전문가들에 대해 “인간을 불구화하는”(13)이라는 엄청 쎈 수식어를 붙이거나, 전문가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생필품과 그 공급을 독점하는 갱단의 사전적 정의에 맞는 것 같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필에 대한 통제권 자체를 요구”(19)하는 새로운 카르텔임을 강조하거나, 전문가의 표식은 “사람의 필요를 결정하며, 그 사람에 대해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권한”(22)에 달렸다는 등의 내용만으로도 후련 한 점이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나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일리치가 문제에 답을 정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리치는 그전문가들이 우리의 품행을 어떻게 인도하는지 그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이를 알아야 우리의 욕구와 감수성, 필요와 생활양식을 정하고 얻는 데에 있어 전문가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전문가는 나쁘다’거나 ‘더 철저한 전문가로 대체하거나 제도의 개선’하자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부정적 근거가 아니라,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일리치는 그럼에도 전문가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는 이유가 전문가에 대한 우리의 ‘환상’에 기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환상’을 밝혀주는데요, 우리의 욕구가 어떻게 ‘필요’로 전도되는가를 그 조건을 분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공통 과제에서 ‘전문가 사회가 결핍을 강화 한다’는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었는데요, 이는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전제하는 전문가적 통치와 다르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욕망이나 결핍을 떠올리면 식욕이나 구매욕 등이 떠오릅니다.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속에서 우리는 늘 무언가를 욕망하며 결핍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욕망을 내재적 결핍으로 생각한다는 글쓴이의 설명에 공감이 가는데요, 한편으로 이런 질문도 듭니다. 욕망을 결핍으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욕망하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욕망은 삶의 기본 조건이 아닌가 합니다. 세미나에서도 이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는데요, 가령 먹을 게 필요할 때 곧바로 상품이나 서비스와 이를 살 수 있는 돈을 먼저 떠올리는 방식과 이를 나눌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필요를 충족하는 삶의 방식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전자의 방식은 일리치가 말했던 ‘빈곤의 근대화’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품과 화폐가 충족의 욕구를 독점해버린다는 건데요, 욕망의 충족이 서비스로 대체 될수록 욕구의 좌절을 겪으며 존재가 결핍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가 없이 자연을 이용하거나 상호부조적인 삶의 방식이 이어지던 시대에는 가난이나 필요가 그렇게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두레나 품앗이 같은 노동 풍습을 통해 필요와 욕구를 충족한 다양한 가치와 방편들이 존재했던 것처럼요. 그런데 측량할 수 없는 가치들이 상품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환상이 생기면서 전도가 일어납니다. ‘배운다’를 학교가 대체하고 낫는다‘를 의료가 대체하며, ’이동한다‘를 교통이 대체됩니다. 이에 따라 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단순히 욕망은 채울 수 있지만 인간의 잠재력이 파괴되고 불구화된 시민을 낳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리치가 제시한 대안인 내핍 생활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결핍을 지니고 있지만 참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필요를 알아가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자율적 활동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기준으로 필요가 결정”(41) 된다는 점에서 전문가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다른 관계 맺기를 실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조에서는 교육과정이 배움을 독점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프로그램에 따라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든 의문과 회의감을 토로하는 것에서 그쳤는데요, 이를 일리치적 관점에서 구체화 시켜보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토론해 보았습니다. 저의 경우 창의성과 자율성을 기른다는 목적 하에 짜여 진 미술 프로그램을 가지고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아이들은 결코 그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늘 그것과는 별개로 자기의 욕구에 따라 뭔가를 찾아내고 기억하고 연결하며 각자마다 고유한 창의성과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을 매번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은 수업을 통해 원하는 가치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요청에 따라 아이들에게 단순히 프로그램대로 따르라고 요구하는 건, 강요와 감시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프로그램을 충실할수록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이 발휘되기 상상력이 획일화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론하면서 이 문제를 수업이 필요 한가 아닌가를 논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이야기는 끝이 없을 거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지 않으면 놀 수 없게 되고 예술이 뭔지도 모르게 되는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인데요, 서비스가 가진 이 일방적인 성격이 인도적 이미지들에 가려 환상이 심화 되고 그로 인해 질문해야 할 부분을 알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사자 자신이 보호나 사랑 같은 가치를 실천한다고 믿는 것이나, 이를 구매하는 개인들은 소비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종교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욕구(want)를 어떻게 절박한 필요(needs)’로 만들었는지 일리치의 관점에서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민호조에서는 병원과 의사에 대해 실제 경험과 관련해 우리가 어떻게 의료 권력과 관계 맺고 있는가를 토론했다고 하는데요, 의사․교사․학자 등의 전문가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저희 조와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일리치가 제시한 내핍 생활이 단순한 자족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비전문가들을 전문화시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는 여전히 지식의 위계화하고 이를 개인에게 주입 시키는 방식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쌓고 자격증을 얻어 자급자족한다는 것은 전문가에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는데요, 일리치와 푸코의 다른 책들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독점화하는 권력’을 포착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낼 세미나에서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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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22 12:28
    잘 의식도 할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필요 속에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걸 일리치를 공부하며 느끼네요. 그 필요는 어디서, 언제부터, 무엇과 관련해서 생겨날까? 어떻게 자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일리치의 고민은 참으로 현재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