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에티카 5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이소영
작성일
2017-06-09 13:56
조회
169
매일 뉴스에 봄가뭄으로 안타까운 소식만 접하던 중 시원히 비가 내려준 수요일이었다. 오랜만의 습기에 영림샘은 코끝으로 느껴지는 공기마저 부드럽다고 하고, 점심식사 후에도 비 덕분에 산책을 못 나가고 실내에서 생기발랄 수다가 난무했던 하루였다. 그럼 이런 촉촉한 날 우리는 스피노자를 통해 어떤 배움을 추구하고 있었을까? 이날 1페이지 정리 숙제는 ‘부적합한 인식’에 대하여 모두 발제를 해오는 것이었다. 부적합한 인식이라 하니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오~ 노! 스피노자에게서 그런 배움이 있을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스피노자가 들려주는 윤리학은 긍정의 에너지를 듬뿍 담고 있다. 그럼 서두는 이만 적고 본론으로 수요일 강의에 관해 정리해보자.
  •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는 없다.


데카르트는 실재가 존재하고 이를 지성이 인식하며 우리는 욕망을 절제할수록 이성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실재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다. 실재들은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단순한 물체에서부터 복잡한 물체까지도 수많은 연관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우리 신체 역시 많은 부분들의 각기 다른 운동과 정지의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실재이며, 기관들이 다른 빠름과 느림의 운동 속에서도 일정한 합성 비율을 유지하는 상태가 신체라는 실재가 된다. 혈액의 운동만 보아도 다른 신체 기관들과 관계 맺으며 존재할 뿐이지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계를 무한히 연장하면 “자연 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이며, 그 부분들, 곧 모든 물체들은 전체 개체의 변화 없이도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한다.”(2부 자연학소론 보조정리7)고 말할 수 있다. 물체의 본질은 어떤 물질이든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변용만 있을 뿐이다.
  • 부적합한 인식 : 상상과 기억


신체는 외부 물체와 관계 맺으며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신체가 외부와 만나 일으키는 변이가 정신이다.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이다. 정신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변용되는 동시에 인식되는 것이 관념이라는 정신작용이다. 외부물체가 우리 신체에 남긴 흔적 그것이 이미지이며 우리는 그렇게 인식한다. 그런데 이 ‘실재들의 이미지’는 외부물체의 본성과 우리 신체의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오히려 외부물체의 이미지에는 물체의 본성보다 신체의 습관에 따른 우리 신체의 본성을 더 많이 가리킨다. 태양의 실재 크기를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태양은 500원 동전크기로 보일 뿐이다. 이것을 정신이 ‘상상’한다고 말한다. 상상은 인식의 오류 같지만 이것이 인간 인식의 토대이며, 우리가 상상한다는 관념을 다시 인식하는 관념을 가진다면 상상은 더 이상 부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상상 역량의 확대로 인간 정신의 확대가 된다.

우리 신체가 여러 외부 물체에 의해 동시에 변용된다면 우리가 한 개의 물체를 상상하게 되면 곧바로 다른 물체 역시 회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억’이다. 로마인이 ‘포뭄’이란 단어를 듣고 유사성이 없는 ‘사과’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신체가 포뭄이란 언어적 신체변용과 사과라는 물체에 의해 습관적으로 신체의 변용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언어라도 다른 실재와 결합하고 다른 신체에 의해 변용된다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언어 역시도 상상의 질서에 따르며 인식의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 적합한 인식을 향한 통로


변용되는 신체의 관념이란 조건 속에서 정신을 구성해야하는 인간은 매번 우연히 마주치는 물체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용돼야만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있을까! 스피노자를 배웠다면 신체의 역량을 잊지 말아야 할 듯!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능력은 신체가 더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면 될수록 더 커진다.”(2부 정리14) 눈을 보기 위한 눈으로 목적론적으로 생각한다면 눈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하나? 장님이라도 신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고 배치하며 다른 기관이 눈처럼 작동하게 한다. 장님이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 변용되고 변용받으며 지각능력을 키우는가란 능동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외적인 실재들의 우발적 마주침에서 외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다수의 실재들간의 합치나 차이, 대립을 이해한다면 그 정신은 부적합한 인식의 통로를 통하지만 적합한 인식을 만들어 갈수 있게 된다.

수업이 시작하며 채운샘은 스피노자가 구성하는 윤리학의 특별함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윤리가 무엇일까?’ 고민할 때 더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누가 올바르고 틀린지 물으며 결국 선악으로 소급하는데 스피노자는 “우리는 왜 윤리적으로 못 사는 걸까?”를 묻는다고 하셨다. 윤리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문제화했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수많은 변용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하는데 우리가 더 많은 변용을 이해할수록 자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문제를 다각화할 수 있다면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도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다각화를 정신의 문제로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단지 신체변용의 관념일 뿐이므로 신체의 다각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굳이 무엇이 먼저인지를 따진다면 채운샘은 신체가 먼저라고 하신다. 신체를 다양한 곳에 두고 내 인식의 오류를 인식하며 신체를 실험하기! 오늘 수업을 봄비로 표현하자면 메마른 정신을 촉촉이 적셔줄 신체라고 해두고 싶다~^^
전체 3

  • 2017-06-11 20:13
    봄비의 촉촉한 여운이 느껴지는 후기입니다^^ 우리는 왜 윤리적으로 못 사는걸까? 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뮈가 더 편하기 때문에~가 아닐까요. 여러가지 각도로 사물을 접하는 것을 발명하는 것은 정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의 문제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무겁고 어려운 문제같은ㅠㅠ

  • 2017-06-12 10:19
    '윤리'를 생각하면 곧장 법이나 도덕규범이 떠오르는데, 스피노자는 역량을 이야기하면서 윤리를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 같네요.

  • 2017-06-12 10:41
    오....! 두루뭉실했던 개념들이 정리되네요. 정신과 신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신체의 변용과 함께 생기는 것이 관념이었군요. 나에게 일어나는 그 변용들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변용이 일어나는 그 장에서 능동적인 태도를 가진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갑자기 또 개념이 몽글몽글 마구 섞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