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중용장구 서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2-01 22:47
조회
136
30년에 걸쳐 완성된 중용에 주희의 서문을 봤습니다. 30년도 못 살은 저로서는 그 숫자가 실감이 안 나네요.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서 주희 자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사서의 틀을 짜고, 그 서문을 쓸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지금이야 흔들림 없는 주류학으로서 비판도 받기도 하지만, 주희도 그 시대에 이단아로 취급되기도 했고, 나라가 휘청휘청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도통(道統)을 말하고, 자신이 중용을 왜 저술했는지 쭈욱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 뜨거움의 원인은 마지막 문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주희는 자신이 저술한 것을 일러 마지막에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도 얻는 것이 있다면 먼 길을 가고 높은 곳에 오르는 데 있어 일조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내 공부가 나에게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과 접목될 수 있는 게 그 뜨거움의 정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저도 남들에게 뜨거움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요? ㅎㅎ;;

中庸 何爲而作也. 子思子 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중용은 어찌해서 지었는가. 자사 선생님이 도학의 그 전함이 잃게 됨을 걱정해서 지은 것이다.

蓋自上古 聖神 繼天立極而道統之傳 有自來矣.

 

대개 옛날부터 성인과 신인이 하늘을 계승하고 세상의 지표를 세워 도를 통하여 전한 것은 스스로 유래를 가진다.

성신(聖神)은 성인(聖人)과 신인(神人)입니다.

도통(道統)이란 단어가 벌써 나왔는데, 주희는 요순부터 우, 탕, 문무주공, 공자, 증자, 자사 그리고 자신에게 이르는 족보를 짰습니다. 이건 공자가 하늘이 자신에게 문(文)을 전할 사명을 주었듯 자신도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 걸까요?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극(極)은 세상의 지표 혹은 중심인데, 예로부터 왕이 있는 자리가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극(立極)이라 하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그 경에 보인즉 진실로 그 중용(中庸)을 행하라라는 것은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전한 것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서경에도 나오고 논어에도 나옵니다. 우쌤이 논어 요왈편 첫 문장을 같이 설명해주시면서 ‘윤집궐중’이 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堯曰 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 永終 舜 亦以命禹

요 임금이 말하길, “! 순아. 하늘의 역수(曆數)가 너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 사해(四海)가 곤궁해지면 하늘이 너에게 준 자리가 영원히 끊길 것이다.”

여기서 역수(曆數)가 순에게 있다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순에게 왕위를 선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우가 순을 발탁했어도 그것을 하늘이 인정해야만 순이 왕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윤집궐중’을 간단히 정리하면, ‘평생 동안 중용(中庸)을 행하며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니 정밀하게 관찰하고, 전일하게 유지함으로써 평생 동안 중용(中庸)을 행하며 살라는 것은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전한 것이다.

 

堯之一言 至矣盡矣而舜復益之以三言者 則所以明夫堯之一言 必如是而後 可庶幾也.

 

요의 한 마디가 지극하고 다했지만, 순이 세 마디를 다시 붙인 것은 곧 요 임금의 한 마디를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이후에야 거의 가까워질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요는 순에게 ‘윤집궐중’ 4글자를 전했고, 순은 우에게 ‘윤집궐중’에 인심유난 도심유미 유정유일 12글자를 더 붙여서 총 16글자를 전했습니다. 여기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나오는데 이 구분이 뒤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蓋嘗論之 心之虛靈知覺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 不同 是以 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

대개 일찍이 그것을 논했는데,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다르게 여기는 것은 곧 어떤 경우에는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성명의 바름에서 근원하여 알고 깨닫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위태로워 안정되지 못하고, 어떤 경우에는 미묘하여 알기 어려울 뿐이다.

 

허령(虛靈)은 대학의 사람의 마음에는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능력이 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대학에서도 사람의 마음에는 모두 ‘허령불매’함이 있다고 한 것처럼, 중용에서도 ‘허령’이라는 무한한 잠재력과 ‘지각’하는 능력은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형기지사(形氣之私)와 성명지정(性命之正)이 대비되는데, 우쌤은 ‘형기지사’를 인심과, ‘성명지정’을 도심과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지각하는 것이 다른 이유도 본디 가지고 태어나는 기질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주를 참고하면, 이목구비와 사지를 형기(形氣)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타고난 신체가 ‘지각’과 연결되는 것이죠.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 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 不能無道心 二者 雜於方寸之間 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 愈危 微者 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그러나 사람들은 이 형체를 가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비록 성인이더라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이 본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더라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으니,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 섞여서 그것을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하면,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롭게 되고, 미미한 것은 더욱 미미하게 되니 천리(天理)의 공평함이 마침내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게 된다.

 

상지(上智)와 하우(下愚)가 나옵니다. ‘상지’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하우’는 구제불능을 뜻합니다. 저는 아직 이 둘 다 잘 모르지만, ㅎ 우쌤은 공자는 ‘하우’마저 어찌할 수는 없다고 봤지만, 맹자와 주희는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방촌지간(方寸之間)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우쌤은 이것을 마음의 크기라고 풀어주셨습니다.

누군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어서 우쌤은 이런 문장에서 위안이 되지 않냐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다스리는 법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용은 수신(修身)을 강조하는 대학과 연결됩니다.

천리지공(天理之公)에서 공(公)을 예전에는 ‘공변되다’라고 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쌤은 지금은 그렇게 하기보다는 ‘공평함’, ‘보편성’ 정도로 푸는 게 나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從事於斯 無小間斷 必使道心 常爲一身之主 而人心 每聽命焉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정밀함은 저 두 가지의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전일함은 본래 마음의 바름을 지켜서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정밀함과 전일함에 종사하는 것은 조금의 틈새도 없게 해서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항상 내 몸의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人心)은 매번 명을 듣게 하면, 위태로운 것은 안정되고, 미미했던 것은 드러나니 동()과 정(),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스스로 지나침과 모자람의 어긋남이 없게 된다.

정(精)은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볼 수 있습니다. 세주를 참고하면, 정찰분명(精察分明)이라 돼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살펴서 분명하게 하는 것이 ‘정’입니다.

일(一)은 핵심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입니다.

정(正)을 쓴 까닭은 도덕적 가치는 그 자체로 옳다는 것을 내포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정(精)과 일(一)은 앞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한 말 중에서 유정유일(惟精惟一)을 풀고 있는 것입니다. 우쌤은 이 두 가지를 잘 행하면 도심(道心)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동정운위(動靜云爲)의 차(差)가 없는 것을 중용(中庸)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夫堯舜禹 天下之大聖也 以天下相傳 天下之大事也 以天下之大聖 行天下之大事 而其授受之際 丁寧告戒 不過如此 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

 

무릇 요 임금과 순 임금과 우 임금은 천하의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천하를 서로에게 전한 것은 천하의 위대한 일이니, 천하의 위대한 성인으로 천하의 위대한 일을 하였어도 그 주고받는 즈음에는 간곡하게 말하고 경계한 것이 이에 지나지 않았으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는가.

 

전(傳)은 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말합니다. 원래 왕위를 줄 때는 선양(禪讓)의 양(讓)을 쓰는데, ‘전’을 쓴 것은 도통(道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自是以來 聖聖相承 若成湯文武之爲君 皐陶伊傅周召之爲臣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

 

이 이래로 성인들이 서로 계승하니, 위대한 탕 임금과 문왕과 무왕이 군주됨과 고요와 이윤, 부열, 주공 소공과 같은 신하됨이 이미 모두 이로써 그 도통(道統)의 전함을 이으셨다. 그러나 나의 선생님은 비록 마땅한 위치를 얻지는 못했으나 지나간 성인들을 계승하여 다가올 배우는 사람들의 길을 열어줬으니, 그 공이 오히려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뛰어남이 있었다.

부자(夫子)는 공자를 가리킵니다.

위(位)는 요, 순, 우, 문왕, 무왕과 같은 자리, 왕위를 말합니다.

개(開)는 ‘길을 열어줬다’는 뜻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성인의 뜻을 전할 수 있게 해줬음을 뜻합니다.

 

然當是時 見而知之者 惟顔氏曾氏之傳 得其宗 及曾氏之再傳而復得夫子之孫子思 則去聖遠而異端起矣

 

그러나 이때에 이를 보고 안 사람은 오직 안회와 증삼의 전함만이 그 핵심을 얻었고, 증삼이 두 번째 전하는 데 이르고, 다시 선생님의 손자인 자사를 얻은 즉 성인과 거리가 멀어지고 이단이 일어났다.

 

견이지지(見而知之)는 ‘보고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문이지지(聞而知之)가 있습니다.

종(宗)은 핵심으로 논어로 본다면,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충서(忠恕)입니다.

이단(異端)은 도(道)가 전해지지 않을 때 나타난 사이비(?) 같은 학파인데, 맹자는 양주와 묵적을 ‘이단’으로 봤습니다.

 

子思 懼夫兪久而愈失其眞也 於是 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 更互演繹 作爲此書 以詔後之學者

 

자사는 오래될수록 더욱 그 가르침을 잃을까 두려워했는데, 이에 요 임금과 순 임금 이래 서로에게 전한 뜻의 근본을 확장했고, 평소에 들은 아버지와 스승의 말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서로 연역하여 이 책을 지음으로써 나중에 배우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리신 것이다.

 

구(懼)는 ‘두려워하다’라는 뜻인데, 우쌤은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과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공자가 난신적자에 의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서 춘추를 지었듯, 자신이 중용을 지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眞)은 앞에서 얘기한 종(宗)과 같이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의(意)는 요, 순이 얘기한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말합니다.

부(父)는 자사의 아버지인데, 증자에게 배우는 것 말고도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역(演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적 논리 추론방식인 연역법과 다릅니다. 연(演)은 ‘늘리다’의 뜻이고, 역(繹)은 ‘탐구해서 끌어내다’의 뜻입니다.

조(詔)는 조서(詔書)를 내릴 때 쓰는 글자인데,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내릴 때 쓴다고 합니다. 공자부터 자사까지 후학들을 위해 가르침을 내린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蓋其憂之也 深 故 其言之也 切 其慮之也 遠 故其說之也 詳 其曰天命率性 則道心之謂也 其曰擇善固執 則精一之謂也 其曰君子時中 則執中之謂也

 

무릇 그 걱정이 깊은 까닭에 그 말이 간절하고, 그 생각이 [먼 훗날에까지] 멀었기 때문에 그 설명이 상세한 것이다. 천명(天命)과 솔성(率性)이라는 것은 도심(道心)을 말하는 것이고, ()을 가려 단단히 지킨다는 것은 정밀함과 전일함을 말하는 것이고, 군자는 때에 맞게 적중한다는 것은 중()을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원(遠)은 생각이 후대에까지 미침을 뜻합니다.

世之相後 千有餘年 而其言之不異 如合符節 歷選前聖之書 所以提挈綱維 開示蘊奧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

 

세상이 서로 이어져서 천년이 흘렀는데, 그 말의 다르지 않음이 부절을 합친 것과 같으니, 이전 성인들의 책에서 두루 뽑아서 강령을 드러내고 내면에 쌓인 깊숙한 것을 보여주니, 이와 같이 분명하고 지극한 것이 있지 않았다.

역선(歷選)은 ‘두루 뽑아내다’라는 뜻입니다. 역(歷)은 ‘두루’, 선(選)은 ‘뽑아내다’라는 뜻입니다.

서(書)는 성인들의 말씀이 기록된 시경과 서경을 가리킵니다.

제설(提挈)에서 제(提)는 ‘당기다’, 설(挈)은 ‘들어올리다’라는 뜻입니다.

강유(綱維)에서 강(綱)과 유(維) 둘 다 ‘벼리’, ‘그물의 굵은 줄’을 뜻합니다. 우쌤은 ‘강유’를 강령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온오(蘊奧)에서 온(蘊)은 ‘내면에 쌓이다’란 뜻이고, 오(奧)는 ‘깊숙하다’, ‘깊숙한 것’이란 뜻입니다. 우쌤은 ‘온오’를 우리가 갖고 태어난 능력, 성(性), 천리(天理), 도(道)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 爲能推明是書 以承先聖之統 及其沒而遂失其傳焉 則吾道之所寄 不越乎言語文字之間 而異端之說 日新月盛 以至於老佛之道出 則彌近理而大亂眞矣

 

이로부터 그리고 다시 전하여 맹자를 얻음으로써 이 책을 확장하여 밝혔으니, 이전 성인들의 계통을 이으셨고, 맹자가 돌아가시면서 마침내 그 전승이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의 도가 의지하는 것은 언어와 문자 사이를 넘지 못하고, 이단의 설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다달이 번성해서, 도교와 불교의 도리가 출현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깝게 되면서 진리를 크게 어지럽혔다.

기(寄)는 ‘의지하다’의 뜻이고, 월(越)은 ‘넘다’의 뜻입니다. 여기서는 주희의 애석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주희는 언어와 문자 사이를 넘지 못하게 된 것을 얘기했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게 정현이나 공영달 같은 학자들입니다. 우쌤은 주희가 그렇게 비판한 것이 그들이 성인의 뜻을 깊이 음미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여기서 주희의 공부는 그렇게 사는 것과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이치가 가깝게 되는 것을 도교와 불교에서 이치를 설명할 때, 그 학파들이 유학의 개념을 가져다 써서 그 뜻을 흐리게 했던 것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북송시대의 소동파만 해도 유, 불, 도를 합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주희는 글자가 비슷해도 그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하자는 것이죠.

然而尙幸此書之不泯 故程夫子兄弟者出 得有所考 以續夫千載不傳之緖 得有所據 以斥夫二家似是之非 蓋子思之功 於是爲大 而微程夫子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이 책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정부자 형제가 나오셔서 고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저 천년 동안 전해지지 않은 실마리를 이으셨고, 근거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두 학파의 옳은 것 같지만 잘못된 것을 배척하셨다. 무릇 자사의 공이 여기에 크고 정부자가 아니면 또한 그 말을 인하여 그 마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부자(程夫子)는 정이, 정호를 말합니다.

고(考)는 ‘고증하다’, ‘상고하다’의 뜻입니다.

미(微)는 ‘없다’의 뜻입니다.

어(語)는 남아있는 중용으로, 그 마음은 중용을 기록한 자사의 마음을 말합니다.

 

惜乎 其所以爲說者 不傳而凡石氏之所輯錄 僅出於其門人之所記 是以 大義 雖明而微言未析 至其門人之所自爲說 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 然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 亦有之矣

 

애석하구나! 그 설명한 것이 전해지지 않고 무릇 석씨가 모아서 기록한 바에서 겨우 문인들의 기록한 것에서 나오니, 이런 까닭에 [중용의] 대의를 밝혔으나 깊은 말은 분석되지 않았고, 문인들이 스스로 설명한 것에 이르러서는 비록 자못 상세함을 다하여 발명한 것이 많으나, 그 스승이 설명한 것을 배반하고 도교와 불교의 젖어든 것이 또한 있었다.

 

우쌤은 주희가 자신의 학문의 시작을 정호, 정이 형제로 잡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단독 저술한 게 없어서 그 둘의 책을 냈는데, 그게 ‘이정유서’라고 합니다. 우쌤은 이것이 주희의 치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정호가 형이고, 정이가 동생입니다. 세주를 참고하면. 정호가 먼저 죽었고 정이는 형을 명도(明道)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미 중용을 말하고 책을 썼지만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주석을 단 건 있지만 책을 쓴 것은 없다고 합니다.

석씨는 정이천의 제자로, 이름은 돈(墩)이라고 합니다.

 

熹自蚤歲 卽嘗受讀而竊疑之 沈潛反復 蓋亦有年 一旦 恍然 似有得其要領者

然後 乃敢會衆說而折其衷 旣爲定著章句一篇 以俟後之君子 而一二同志 復取石氏書 刪其繁亂 名以輯略 且記所嘗論辦取舍之意 別爲或問 以附其後

나는 어릴 때부터 일찍이 책을 받아서 읽었는데, 나 혼자서 그것을 의심하여 깊이 연구하고 반복하였다. 대저 또한 이렇게 하다 보니, 어느 날 황홀해져서 요령을 얻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연후에 이에 감히 여러 사람들의 설명을 모으고 그것을 절충하여 이미 장구 한 편을 써서 드러내어 훗날의 군자를 기다리고, 한 두 명의 동지와 다시 석씨의 책을 취하여 번잡하고 난잡한 것을 없애고 [중용]집략이라 이름 붙이고, 또 일찍이 논변하며 취하고 버린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중용]혹문을 만들어서 그 뒤에다 붙였다.

수독(受讀)은 ‘가르침을 받다’ 혹은 ‘책을 받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석돈의 책을 받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절(竊)은 ‘혼자’, ‘몰래’ 라는 뜻입니다. 의(疑)는 ‘의혹하다’입니다.

침잠반복(沈潛反復)은 주자가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침잠(沈潛)은 둘 다 물에 잠겼음을 뜻하는데, 그만큼 마음을 안정시키고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황(恍)은 ‘황홀하다’의 뜻입니다.

요령(要領)은 핵심입니다. 요(要)는 ‘허리’이고, 령(領)은 ‘목’입니다. 우쌤은 옷 입을 때, 상의는 목부분을 쪼매고, 치마는 허리를 쪼매는데, 그때 옷 입는 방식을 부위와 연결해서 ‘요령’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우쌤은 정저(定著)에서 정(定)을 쓴 것에 주목하셨습니다. 주희는 예기에서 중용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때 챕터를 나누어 정했다는 것을 이 ‘정’이란 글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然後 此書之旨 支分節解 脉絡貫通 詳略相因 巨細畢擧 而凡諸說之同異得失 亦得以曲暢旁通 而各極其趣 雖於道統之傳 不敢妄議 然 初學之 或有取焉 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

 

그렇게 된 후에 이 책의 뜻이 장을 나누고 안 풀리는 부분을 해설하여 맥락이 관통해서 상세한 것과 소략한 것이 서로 도움이 돼서, 큰 것과 세밀한 것이 모두 포함되고, 여러 학설의 같고 다르고 득과 실이 또한 굽혔던 것이 펴지고 옆으로도 연결이 돼서 각각 그 뜻이 다하게 됐으니, 비록 도통(道統)이 전해지는 것에 감히 논의할 수 없으나 처음 배우는 이라면, 어떤 경우에 얻는 것이 있은즉 또한 먼 곳을 가고 높은 곳에 오르는 데 있어 일조할 뿐이다.

지(支)는 ‘가지’라는 뜻으로, 가지가 나뉜 것처럼 이 책의 나눈 것을 말합니다.

절(節)은 ‘마디’인데, 그것을 풀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뜻을 알기 어려웠던 부분을 자신이 해설함으로써 알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곡(曲)은 ‘굽히다’의 뜻이고, 창(暢)은 ‘기운이 쭉 퍼지다’, ‘알려지다’의 뜻입니다.

취(趣)는 취미(趣味)로 쓰이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뜻 의(意)로 쓰였습니다.

淳熙 己酉 春三月 戊申 新安 朱熹 序

 

순희 기유년 봄 3월 무신일 신안 주희가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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