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프로젝트 7.12 영화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8-07-17 10:49
조회
158
180712 영화후기

다음 시간 공지에 후기로 호명되어 갑자기 영화 후기를 쓰게 되었네요. 친애하는 반장님의 강권이므로 자발적으로(?) 따를 수밖에요;; 이번에 함께 본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였습니다. 전 20대에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도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고,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지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번에도 영화는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영화가 주는 단순함이 오히려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을 함께 공부하는 상황에서 영화의 어떤 포인트를 짚어 보아야 할지 고민인데요, 영화의 문법도, 아직 이슬람이 무엇인지도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섯부른 짓인 것 같아 그만 두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도 ‘이슬람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봉착해 이야기가 많이 맴돌았지요. 영화에 대한 느낌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에 보면서는 관습과 생활양식, 환경 등에 더 시선이 가긴 하더라고요.

일단 영화는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이란의 코케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아미르라는 초등2학년 아이가 실수로 잘못 가져온 친구의 노트를 돌려주러 먼 이웃마을 포쉐르로 찾아간다는 스토리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상황이 바뀌고 우연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만 반복하는 어른과 친구를 찾아가야만 하는 아이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지요.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생활과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순한 교리의 꾸란과 이것을 실천하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그들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의 단순한 스토리가 이런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대기에 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지그재그로 난 길은 영화 내내 가장 시선을 압도하는 장면입니다. 아미르는 빵을 사오라는 엄마의 부탁을 듣고 그 참에 친구의 노트를 돌려 줄 요량으로 노트를 감추어 가지고 나옵니다. 친구 네마짜데가 사는 포쉐르는 학교에 지각을 해도 이해 될 만큼 먼 곳입니다. 네마짜데에 대해 아미르가 가진 정보는 혜화동에 사는 ‘지은이’ 정도입니다. 여정에 나서기 전 할 일 없이 동네 가운데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아이를 길들이기 위해 불필요한 심부름을 시킵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실패가 예상되는 길이지요. 그럼에도 아이는 선뜻 낯선 길을 나섭니다.

그 길은 삶의 행로로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길을 나서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 길에서 길을 찾고, 길을 물어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미르도 그 길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지요. 낯선 동네 사람들, 허리가 아픈 학급 친구 등, 그들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나마짜데의 정보에 접근해 갑니다. 물론 그리 유용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죽은 나무가 있는 옆집, 동네 흔한 파란 대문 집, 하는 식이죠. 학급 친구를 통해 어렵게 알아 낸 네마짜데의 사촌 해마티는 방금 아미르의 동네 코케로 떠나 버리기도 합니다. 동일성에 갇혀 자기 말하기 바쁜 어른들 틈에서 막연하고 낯섦 안에서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 가고 있는 것이지요. 노트는 내일 아침 돌려주라는 엄마의 코드도, 흔한 게 네마짜데라는 이름이라는 어른들의 코드도 아닌 그를 찾아 오늘 노트를 돌려주는 길을 선택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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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네마자데의 집까지 함께 가 주겠다는 조금 다른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는 전통 나무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영화가 대부분 화면을 타이트하게 잡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기억에 길을 뛰어가는 네마짜떼의 모습과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화면이 줌 아웃 합니다. 집에서 나오는 할아버지를 잠깐 기다리는 동안 아미르를 중심에 작게 놓고 길과 길 사이 담과 담의 직선과 곡선이 다 보이도록 잡습니다. 이제 좀 전체를 보나 싶게 말이죠. 전 여기가 늘 찡 하던데요. 네마짜데도 그 할아버지 집에서 놀다 갑니다. 할아버지가 만드는 문살이 예쁜 나무문은 이제 인기가 없습니다. 지금은 철문으로 바꿔 다는 시대니까요. 철문은 한 번 달아 놓으면 몇 십 년은 족히 견딥니다. 평생도록 쓸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이죠. 할아버지의 자식들도 철문 다는 일로 전업하거나 도시로 떠나 버렸습니다.

문은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기도 하고 외부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영화에서 문은 문명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겪어야 하는 이들의 입장을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지난 시간 세미나를 통해보면 이슬람은 근대화 과정에 많은 부침을 겪습니다. 서양 중심의 근대화는 코란에 근거해 단순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근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종교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였고, 더불어 삶의 윤리가 바뀌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세계적 흐름에서 이슬람 모든 국가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서양에서 30년 이상 준비 된 근대화 과정을 이슬람은 단기간에 수용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구요. 이슬람은 더 많은 분파로 갈라지고 꾸란을 해석하는 과정에 원리주의로 흐르기도 했습니다. 문이 이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철문으로 표현되는 대세적 흐름 앞에 할아버지는 느리고 뒤쳐진 존재이지요. 마음이 급해 내달리는 아미르의 걸음에 비해 느리기 한이 없는 할아버지의 걸음은 빨리 간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안 것이겠지요.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구원 받기 힘든 고립된 상태가 될 테니까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미르가 노트를 전달했을까요? 네~ 예감하듯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집을 알았지만 부는 바람과 개 짖는 소리가 아미르의 길을 막아섭니다. 네마짜데의 집을 찾아가는 길에 샘터에서 할아버지는 아미르에게 잠시 쉬어가자고 하지요. 그러면서 하얀 들꽃 한 송이를 노트에 꽂아 놓으라며 전합니다. 꽃은 할아버지에게서 아미르에게로 전달되며, 할아버지의 사유를 아미르에게 전달하는 매개로 보입니다. 꽃이 꽂힌 노트를 들고 할아버지와 아미르는 다시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당신 집 앞에서 아미르를 혼자 돌려보냅니다.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는 그 밤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아미르의 마음에도 폭풍이 일어났겠지요.

다음 날 교실에선 어김없이 숙제 검사가 시작되었고 네마짜데는 초조합니다. 그날따라 아미르는 조금 늦게 도착합니다. 포쉐르에서 오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다시 정정하지요. 거짓이 안 통할 거란 걸 알았겠지요. 그리고 자신이 대신 숙제를 해준 노트를 네마짜데에게 전합니다. 선생님의 숙제 검사에 꼭 맞추어 전달된 거죠. 한 송이 꽃과 함께 성공에 대한 축하처럼 말이죠. 실패가 있었어도, 좀 늦게 도착했어도, 아미르는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지요. 단순하고 반복되는 삶이지만 풀꽃 하나 건네는 틈을 만들어가면서 말이죠. 자본과 문명으로 화려하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어도 들꽃 한송이로 충분한 관계가 있지 않나요? 아미르와 네마짜데처럼 말이죠.

 
전체 2

  • 2018-07-17 11:27
    할아버지는 기존의 어른들과 다르게 그려졌는지 잘 모르겠군요..! 다음 회식 때 안건으로 삼읍시다. ㅋㅋ 문과 길 얘기는 재밌네요. 둘을 어떻게 연결해서 새롭게 영화를 그려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전 꽃은 항상 아마드가 네마짜데에게 건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컷을 보니 왠지 이 꽃은 어쩌다 선생님에게로 향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물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

  • 2018-07-17 18:56
    아, 들꽃! '실패가 있었어도', '좀 늦게 도착해도'. ^^ 정옥 선생님의 각서도 규문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