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1학기 2주차(2.27)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2-21 18:31
조회
229
“니체로 읽는 문학” 첫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학기의 주제는 “힘들의 우주, 심연의 고래”이고, 핵심 개념은 그 유명한 ‘힘에의 의지’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는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니체의 전 저작을 읽는 와중에도 힘이나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은 모호하기만 했는데요. 들어봐서 익숙하긴 하지만 막상 뭔지는 모르겠는 그런 개념이죠. 그도 그럴 것이 힘이라는 개념이 전적으로 의식에 드러난 현상, 사물, 운동 배후에 잠재된 뉘앙스, 징후, 비유기체적 영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그런 차원은 사실상 우리의 언어나 표상으로 파악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힘에 관해 논하는 “우리는 학문에서 어떤 시민권도 가질 수 없다”(<유고>19, 2[88])고 적고 있습니다. “모든 내면적 정신적 활동은 실제로 “비학문적”이다.”(1[50]) 그래서일까요? 힘에의 의지에 관한 니체의 사유는 책의 형태로 발표된 니체의 저작들보다 발표되지 않은 유고에 더 짙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차라투스트라> 출판 이후 1885년에서 정신적으로 붕괴한 1889년까지의 유고에는 힘과 힘에의 의지에 대한 단초들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 유고들은 나중에 여동생에 의해 편집 발간된 <힘에의 의지>의 저술 노트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책은 파시즘에 의해 왜곡되어 작성돼 버렸지만요. 그래서 저희는 힘에의 의지 개념을 복원(?) 혹은 재해석하기 위해 유고를 읽습니다. 채운샘은 들뢰즈의 ‘드라마화’라는 개념을 알려주셨는데요. 마치 음표나 각본처럼 남아있는 니체 생각의 조각들을 어떻게 꿰어서 연주하고 상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저희의 과제입니다. 우리에게서 니체를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이것이 이번 학기, 그리고 올해 공부의 핵심입니다.

오전 토론 중에 니체의 한 메모인 “명랑한 지식Gai saber”(1[121])이라는 표현으로부터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가벼움과 웃음과 관련되는 ‘명랑함’과 무거움과 진지함과 관련되는 ‘지식’이 함께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즐거운 학문’이라는 제목에도 해당합니다. 이 질문은 발전되어, 니체에게서 명랑, 춤, 가벼움, 웃음, 가면 등의 이미지가 자기극복과 고독, 고통, 훈련 등의 이미지가 함께 이야기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희는 읽어온 텍스트를 뒤적이며 몇 가지 대답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춤을 추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 철저히 걷고 달리는 법을 배웠어야만 한다는 구절(1[2]), 권력의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쾌락과 고통은 결코 대립이 아니라는 구절(2[76]), 니체의 측정은 그것이 쾌감이나 불쾌감을 주는가가 아니라 대립디는 무시무시한 충동들을 자기 안에서 얼마나 많이 불러일으키며 그것에 의해 몰락하지 않고 감수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구절(1[5]) 등. 이런 구절들을 읽다 보면, 니체에게서 춤과 훈련, 명랑함과 고독, 즐거움과 고통의 문제는 우리의 상식처럼 구분되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식’은 어떨까요? 또한 서구 문화에서 지식 혹은 철학이 무겁고 딱딱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고정불변한 진리와 가상의 대립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식이 진리와 관계 맺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요? 정확히는, 변하는 것들을 가상이자 오류로 여기게 만드는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더 강하고 지배적인 힘들에 의해 매번 생산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면 어떨까요?(어느 단편에선가 니체는 강자들은 “우리 진실한 자들”이라며 자기 진실을 입법하는 자라고 했던 부분이 생각납니다) 그런 진리와 관계 맺는 지식 혹은 배움은 기쁨, 가벼움, 명랑함과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여전히 명료하진 않지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유고>를 읽으면서 제게 계속 남아 있는 질문은, 세계를 힘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니체는 왜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부제를 “모든 사건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시도”(1[35])라고 적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건들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것을 힘으로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시도는 우리 사고방식과 관점의 어떤 지점을 달리 보게 할까요? 어쩌면 한 학기 내내 품고 가야 할 질문인 것 같습니다.

첫 시간 후기는 여기서 마치고 과제 요령을 공지드리겠습니다.

-니체의 유고를 분량만큼 읽고 메모하면서 1교시에 함께 강독할 10개 구절을 뽑아 프린트해 옵니다. 각자 뽑아온 나름의 이유와 생각들이 있을 것이니, 그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봅니다. 그 구절들이 쌓이면 함께 공유할 참고자료로도 활용 가능하겠죠?

-문학과 관련해서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풍요롭게 생각할 수 있는 구절을 ‘엄선하여’ 3개를 뽑아옵니다. 여기에도 나름의 이유와 생각이 있을 테니 2교시에는 그것을 공유하며 토론합니다.

-강의가 없는 홀수 주 3교시에는 ‘내가 만난 니체’라는 주제 글쓰기를 위한 일종의 밑천 마련 ‘자기주도학습’을 공유합니다. 니체라는 사람, 니체의 시대 등을 알 수 있는 책들을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소개하는 시간입니다.

다음 주에는

1)<유고>19권 227쪽 까지 읽고 10개 구절 뽑기

2)<백년의 고독>1권 157쪽까지 읽고 3개 구절 뽑기

3)‘내가 만난 니체’라는 글을 어떤 주제로, 어떤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할 것인지 적어옵니다. 그러기 위해 어떤 책을 읽을지도 선정해봅니다.

*간식은 경희샘과 인영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2

  • 2021-02-21 21:53
    후기를 이렇게 빨리 올리시다니! 해야할 과제도 정리해주시고 감사합니다^^

  • 2021-02-22 00:26
    니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발생한 현상에 대한 해석이며 사실 그 자체는 없다고 보았는데 그 해석은 힘들의 투쟁으로 드러난 결과이기 때문에 뭔가 유기적인 관계성을 보여주려는 의미로 이런 부제를 붙이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세계를 힘으로 본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 <자기극복에 대하여>에 힌트가 있는 것 같았어요. 삶의 근본? 삶의 법칙? 생명체의 천성? 으로서의 힘을 말하고 있어서요. 저는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나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는 문장에서 강렬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어서요.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힘의지의 보편성과 우리가 읽을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별성이 어떻게 마주칠지, 해석될 수 있을지 그게 가장 기대되는 점이에요. 연이은 세미나 중에도 이렇게 빨리 잘 정리해주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