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9주차 후기

작성자
봉선
작성일
2020-09-29 23:33
조회
96
후기가 매우매우 늦었습니다. 죄송
이번 수업에서는 채운샘이 들뢰즈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한꺼번에 정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초월성이 양태의 역량을 저하시킨다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그게 아니하고 하는 거고요. 그는 ‘왜 개체에게서 역량과 존재가 분리될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게 혼동이 되요. 역량은 코나투스이기도 하고 운동성이기도 하는 데 어떻게 존재와 분리되지? 역량이 코나투스라면 분리된다는 것은 코나투스가 줄어드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또 성립되지 않습니다. 코나투스는 욕망이기도 하니까요. 욕망이 줄어든다? 대상에 대한 욕망은 커지거나 줄어들 수 있지만 욕망 자체가 작아지거나 커지진 않죠. 그럼 왜 역량과 존재가 분리된다고 할까요?
『차이와 반복』에서 수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영은 물의 운동과 더불어 개체의 다양한 리듬이 수영이란 운동을 생산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게 물과 개체의 마주침이고요. 우리가 역량과 분리될 때는 숨을 참고 온몸을 긴장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물의 다양한 변화도 공기의 흐름도 받아들이지 않고 잔뜻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꼬르륵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빠지죠. 수영이란 활동으로 물과 합이 될 수 있는 게 역량이라면 그 물의 운동성을 숨을 참는 방식으로만 반응하는 게 개체의 수동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존재가 습관화된 패턴만 고수할 때 우리는 역량과 분리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채운 샘은 초월성과 일의성을 철학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하셨는데요. 그만큼 중요한 게 아닌가 합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초월성을 극복하나. 그것은 극소수만 도달한 지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도, 들뢰즈도 초월성이 비판하면서 내재성을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초월성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결핍을 발생시키기 때문인거죠. 채운샘 표현으로는 초월성이란 단어를 전혀 몰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초월성을 생산한다고. 외부의 척도가 비교를 발생시키고 비교는 결핍을 생산하고 결핍은 또 다시 외부의 척도에 의존하게 합니다. 스피노자가 그토록 벗어나라고 하는 수동성으로 삶을 소진시킨다고나 할까요.
코나투스는 애초에 목적이 없습니다. 욕망에 목적이 생기는 것은 외부와 결탁될 때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싶고 좋은 집에 살고 싶고 건강한 외모를 가지고 싶고. 이 좋음은 어떤 외부와 비교를 통해서 발생하는 좋음이고요.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진다 해도 더 좋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외부의 척도로는 우리가 해방에 이르지 못한다하는 거죠. 그것이 주체가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주체라고 하는 것도 어떤 경향성이 없다고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채운샘이 계속 강조하는 게 주체 없음이 아니라 주체가 구성된다 하는 거니까요. 초월성을 던져 버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성으로 신과 양태가 하나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그 출발이 나에서 시작한다는 것. 여전히 어렵지만 이번 수업에서 초월성이 아닌 일의성의 사유가 좀 더 다가온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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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3 09:24
    들뢰즈 선생님과의 만남은 앞으로도 쭈욱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렵지만, 왜 그렇게 일의성을 강조하는지도 아~주 약간은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초월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는 것도 좀 더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방학 동안 들뢰즈 책 읽으면서 다시 여기저기서 뽕을 받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