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3학기 에세이 발표 후기+ 4학기 첫 시간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10-13 13:15
조회
161
에세이 발표가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놓고 있네요. 마지막 학기의 주제는 ‘나와 정치’입니다. 에티카를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돌이켜보니,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철학을 이렇게 찐하게 만난 적이 있었나 싶네요. 이 만남의 마침표를 허투루 찍을 수 없으니 벌써 긴장되기 시작하네요. 그동안 저에게 정치란 무엇이었고, 제가 배운 정치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면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야겠습니다.

다음 시간 공지하겠습니다. 《전복적 스피노자》 1장 〈스피노자, 그가 현재적일 수밖에 없는 다섯 가지 이유〉, 《스피노자의 귀환》 〈스피노자와 네그리: 활력의 존재론과 절대 민주주의 정치학〉을 읽고 노트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봉선쌤께 부탁드릴게요!

항상 에세이 발표시간은 다른 의미에서 배움이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앎을 형성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후기를 남겨보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의 끝에까지 이르기

매번 에세이를 쓸 때마다 힘들게 쓰는데요. 애를 끙끙 쓰면서도 잘 안 써지는 이유가 뭘까 고민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지금은 잘 안 써지는 이유를 따로 찾지는 않습니다. ㅎㅎ

스피노자는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하기’라는 말을 했는데요. 주체의 자유의지를 비판한 스피노자가 저 말을 어떤 의도에서 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글쓰기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글쓰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하기’란 무엇일까요? 우선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하기’의 반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채운쌤은 모르는 것을 소화되지 않은 채로 쓰는 것을 얘기해주셨죠. 에세이를 쓸 때마다 저의 고질병 중 하나가 바로 모르는 것을 소화되지 않은 채로 쓰는 것임을 마주했는데요. 이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이 그동안의 목적이었고, 앞으로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모르는 채로 어떤 개념이나 구절을 가져다 쓰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려는 역량을 발휘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다른 점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가져다 쓰는 것도 역량을 발휘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절을 씹어서 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배우는 일은 우리에게 낯선 사유방식을 따르는 일입니다. 낯선 방식으로 사유하다 보면 서걱거리는 지점도 있고, 제기했지만 명백하게 풀리지 않는 문장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이 글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여백으로 기능합니다. 또, 그런 서걱거리는 지점이 글이 가볍다는 느낌을 줍니다. 가볍다는 것은 이미 그 문제로부터 거리를 뒀다는 뜻입니다. 서걱거리는 지점들은 내가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는 과정들입니다. 글을 쓸 때는 그런 서걱거림을 얼마나 잘 겪는지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단순하게 글을 쓰기 위해 인상을 쓰고, 끙끙대는 것들은 전혀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힘들 수는 있지만, 그런 와중에 다르게 사유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에세이를 망칠 때마다 너무 자괴감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자위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말에 비춰보면, 전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채운쌤은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하기를 이행의 무한한 반복으로 얘기해주셨습니다. 특정한 목표만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이동하기. 이동의 결과 새로운 벽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또 그 자리에서 이동하기. 즉, 상(相)을 세우고 허무는 부단한 이행(無住相)이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차이와 반복》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한 존재자가 궁극적으로 ‘도약’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서 그 정도가 어떠하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끝에까지 이르고 이로써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끝에까지’라는 말은 여전히 어떤 한계를 정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계, 경계가 가리키는 것은 사물을 하나의 법칙 아래 묶어두는 어떤 것도, 사물을 끝마치거나 분리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103)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읽고 ‘할 수 있는’에 방점을 찍기보다 ‘끝에까지’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한계, 경계라는 말은 개체가 자기 무력함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 아니라 새로이 역량을 펼쳐갈 수 있는 시작지점입니다. 공부할 때는 이런 한계들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문제가 글의 목표가 되어 공부의 원동력이 되고, 문제가 옮겨간다고 해도 새로운 목표, 새로운 원동력이 생깁니다. 이럴 때 한계는 개체를 슬프게 만들기보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문제로 다가오게 됩니다. 공부하면서 이 한계를 얼마나 많이 마주했었는지를 돌아보면, 손에 꼽는 것 같습니다.

 

기쁨의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

이번에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남은 윤리적 문제는 ‘기쁨의 마주침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의 마주침을 조직하는 것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슬프게 하는 조건과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를 능동화하는 기예를 발명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릅니다. 앞에 있는 것이 기쁨을 많이 경험함으로써 기쁨으로 도약하려는 시도라면, 뒤에 있는 것은 지복을 소유하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두 경우는 이성이 무적이 되는 문턱에 이른 것과 이르지 못한 것만큼이나 다릅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지점은 앞에 있는 경우입니다. 글쓰기에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조건에 대한 물음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장 시도할 수 있는 기쁨의 마주침의 조직은 글쓰기인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조건에서 슬픔을 겪는지 이해하고, 그로부터 기쁨으로 이행하기 위한 길을 분석이 글쓰기입니다. 이는 곧 글쓰기가 나의 조건을 분석하고 나아갈 길을 밟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 저희가 공통적은 겪은 문제도 이 길을 제대로 밟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정리를 열심히 해오신 선생님도 계시고, 나름대로 자기 문제의식을 밀고 나간 선생님도 계시지만, 서로의 문제의식이 서로에게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채운쌤이 글을 쓸 때는 처음보는 사람도 이해시킨다는 생각으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이해시키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써야 자명하다고 믿었던 생각이 조금이라도 흔들립니다.

적합한 관념으로의 이행도 자신의 관념, 자신과의 관계를 변형시키고 교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나를 슬프게 하는 대상에게서 문제를 찾기보다 나의 관념이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이해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이해는 특정한 테크닉을 동반해야 견고해집니다. 가령,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이해는 실천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고귀한 존재는 남들과 다른 탁월함을 발명하고 실천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규율을 만들고 폐기했습니다. 승가공동체도 이와 비슷합니다. 걸식하고, 포살(布薩)-자자(自恣) 같은 자리를 갖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구체적 전망을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삶을 조형할 줄 모르고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노예입니다. 노예가 노예인 이유는 삶에 대한 간절한 전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다고 해도 그들이 바라는 삶은 지금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유토피아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삶에서 배움은 간절해지지 않습니다. 삶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구체적 테크닉 속에서 펼쳐내기 시작할 때만 배움도 보다 간절해집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테크닉을 이행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왜 단순히 책 내용을 잘 외고, 그럴듯한 글을 쓰는 것일 수 없는지 조금씩 이해되고 있습니다.

올해 두 번의 에세이를 말아먹으면서 어떻게든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글을 써가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시간에도 저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에세이 발표도 10주의 공부기간 중 하나인데 자꾸 그날만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남은 한 학기는 그간 공부의 마무리인만큼 더 공부를 적극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번 학기도 고생하셨고, 남은 학기도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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