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2 네 번 째와 다섯 번 째 시간 후기입니다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09-15 10:32
조회
111
 

네 번째, 다섯 번째 시간 후기입니다.

 

먼저 네 번째 세미나 때는 권력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과 관련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16세기 들어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목 권력이 깨지고 새로운 권력의 형태가 생깁니다. 이 새로운 권력의 형태를 푸코는 ‘인간의 정치적 통치’라고 말합니다. 생명 정치 권력으로 넘어가기 전 징검다리(?)이자 그 단초들이 나타납니다. 권력 형태가 달라지는 지점에 주목하면서 푸코가 강조 한 건 무엇일까요? 토론에서 사목 권력에서 정치 권력으로 달라질 때 품행의 인도라는 문제가 단절되는 게 아니라 연속성 속에서 더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사목 권력에서 품행의 인도는 종교적 영역에서 영혼의 구원이라는 문제로 다뤄졌다면, 과학 기술과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정치 권력에서 품행은 주권의 문제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푸코는 이 지점에서 통치가 더욱 세심해졌다고 강조한다고 합니다. 권력의 형태가 어떻게 더 촘촘 졌다는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았더랬죠.

정반장님이 제기 했던 질문과 이에 대한 논의를 최대한 정리해 옮겨 봅니다. 먼저 사목 권력에서 품행의 인도는 대항품행과 서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확대되고 서서히 정치 권력으로 이어집니다. 이 정치 권력의 특징은 이전의 사목 권력에서는 보이지 않던 성찰적 프리즘이 나타난다는 점인데요. 쉽게 말해 스스로 어떤 관점에 따라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재생산 함으로써 동시에 그와 반대 되는 것을 배제하거나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전 처럼 특정한 권력자나 왕의 말에 복종하고 따르는 게 아니라,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스스로 시민으로써 군인으로써 학생으로써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앎과 생각과 행동들을 재생산해 낸다는 것이죠. 시민, 군인, 학생이라는 프리즘에 입각해 나와 타자의 행동과 생각을 스스로 인도하는 방식인데, 얼핏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같지만 여기서 개인은 점점 무능력해지고 고립됩니다. ‘하게 함으로써 다른 걸 안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프리즘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 안에 갇혀 문제를 전혀 다르게 사유할 수 없다는 게 문제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하나하나의 행위에 대해 수치화하고 추상화하고 이를 이용해 진실 혹은 앎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 권력의 작동 방식이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꾸 빠지기 쉬운 문제가 국가나 권력을 실체화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정태적인 권력의 이미지에 갇히게 되고, 좀 더 좋은 제도나 더 발전된 기술 등을 문제 삼는 데서 그친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이에 대해 통치도 대항품행이라는 예측되지 못하는 반응에 따라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점과 사람들이 다른 품행을 개발하는 것과 함께 통치도 방식을 바꾸고,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권력도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외부의 어떤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화하는 방식을 질문하는 것이 다른 길을 내는 시작이라는 이야기 인 듯 싶습니다.

 

다음으로 많이 논의 했던 부분이 쿠테타의 세 가지 속성, 법을 뛰어 넘는다는 것과 폭력과 연극에 관해서입니다. 이중 쿠테타에 연극이 내포되어 있다는 경혜샘의 말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선희샘이 국가 이성과 쿠테타는 정반대일 거 같지만 연극성과 연결지점이 있다고 하셨고 경혜샘이 이를 다시 “왕권이 스스로를 현시하는 방법=연극=쿠데타”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국가가 따로 있고 연극을 도구로서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 국가이성과 어떤 점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

 

또 공감했던 질문이 국가가 실천적 총체라고 할 때 제도, 통치, 국가이성 뿐 아니라 개인도 포함 되는 거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경혜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에 대해 혐오하는 것도 실체화의 일환이라는 점이 좀 놀라웠습니다. 이에 대해 반장님이 푸코는 권력과 주체를 따로 놓지 않았다는 점을 되짚어 주셨습니다. “권력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개인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 속에서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푸코가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주체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라고 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면 권력이 무엇인가, 그 안에서 개인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생산되고 있나”를 질문하고 있다고 정리해 주었습니다.

 

다섯 번째 시간에는 새로운 통치술을 특징짓는 외교‧군사 체제‧내치 등을 보면서 ‘국가이성의 목표는 국가다’라는 맥락을 풀어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앞의 내용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국가 이성이라 하면 어떤 국가라는 실체가 또 자꾸 떠오르는데, 결국 국가는 제도의 총제이자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다루는 기술의 총제를 가리킨다는 채운샘의 이야기도 실마리 삼아보고 책의 내용을 더듬더듬 풀어보는 과정이 어려웠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반장님과 난희샘은 성찰적 프리즘이 중요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우리는 국가라면 물질적인 뭔가가 있어 그거랑 관계 맺으며 국가와 나의 관계를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국가가 외교‧군사‧내치 등을 통해 특정한 상태로 출현하려면 담론 속에, 특정한 성찰 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찰적 프리즘 안에서 제도나 법 등에 대해, 우리는 법이 있고 왕이 있는 세계 속에서 산다고 여기지만, 푸코는 국가를 특징짓는 시스템들을 의미화하고 담론화 하고 문제화하는 틀 속에서 국가가 실체화 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시대별로 왕과 통치자가 있다하더라도 역사적 문화적 담론과 의미화 하는 프리즘 안에서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요.

여기서 민호가 재미있는 질문을 했는데요, 예전에는 국가의 생의 주기가 끝나는 방식으로 쇠퇴하거나 이를 회피하려고 하려는 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논의 끝에 어떤 국가가 단독으로 혁명의 주기를 밟아나가는 게 아니라 항시적인 전쟁 속에서 긴장된 평화와 한편으로 경쟁 속에서의 증강을 꿈꾸게 되었다. 그걸 어떻게 생성소멸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간관을 갖는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유의 문제가 틀에 맞추는 것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알아서 통치하는 방식으로 조직화 되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섬뜩했고 우리의 앎이 어떤 배치 속에서 어떻게 관계 맺으면서 장용하는지 짚어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국가라는 것을 어떻게 새롭게 봐야하는가를 문제가 나의 인식 관점을 문제 삼는 것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푸코의 통찰력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추상적인 평화‧평형‧균형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이나 견제 혹은 전쟁 속에서 이루어진 균형을 우리가 평화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 여러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5주 동안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를 읽는 내내 마치 외국어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국가나 권력, 통치 등에 대한 푸코의 이야기들은 기존의 것과 뭔가 다르다, 대단하다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죠. 물론 그 느낌과 언뜻 드는 생각들을 말하거나 쓰려고 하면 도무지 하나도 정리가 안 되고 애매모호한 상태로 흩어져버리곤 했지만요. 토론 할 때도 이런 느낌은 계속 되었구요. 그런 점에선 매번 새롭게(?) 푸코를 만나긴 했네요. 암튼, 책을 읽고 요약을 할 때도 계속 모호했던 부분들 중, 세미나를 들으면서 좀 더 되짚어 보게 된 것을 옮겨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다음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9-09-20 10:43
    푸코에게는 아무리 먼 과거의 이야기를 해도 뭔가 뜨거워지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배우고 싶네요ㅎㅎ
    다음주부터는 일리치 선생님을 만납니다. <학교 없는 사회> 3장 '진보의 의례화'까지(~p.110) 읽어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