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에티카 3강 후기

작성자
금란
작성일
2017-05-30 08:32
조회
178
규문 절차탁마Q 2학기 /<에티카> 3강 후기

기하학적 순서에 따라 증명된 『에티카』는 스피노자 자신의 사유의 여정이 펼쳐지는 발생으로서의 과정을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유일한 저술인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의 부록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만약 인간이 자연의 전 질서를 명석하게 이해했다면, 그들은 만물이 수학에서 다뤄지는 모든 것들과 똑같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연이든 수학이든 진리에서 발견되는 이치는 동일하며 삶도 수학처럼 정답이 있다 뜻인가. 철학에도 맞고 틀리는 정답이 있을까? 지금은 푸코의 말처럼 모든 철학적 개념은 모두 삶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연장통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개념을 익히며 스피노자 철학이 내게 주는 삶의 유용성을 발견하는 일에 주력해 보자.

3강은 2강에서 나왔던 개념(자기원인, 실체, 속성, 양태, 변용, 유한, 무한 등)들을 헷갈리지 않게 좀 더 단단하게 다져가는 시간이었다. 이 중 스피노자의 철학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데 열쇠가 되는 실체-속성-양태의 주요개념인 동일성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며,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바깥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며, 양태는 실체의 변용들로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 그런데 이것들은 개념적으로는 같지 않지만 사실은 동일한 실체 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와 속성과 변용이라는 것은 실체의 변용들이 양태다. 실체가 있고 그 실체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이 속성이다. 실체는 오로지 속성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면 실체가 표현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속성이 실체보다 더 앞선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실체-속성-양태들 사이의 위계는 없다. 다만 실체의 속성의 변용은 양태들 없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들러 역시 ‘실체가 속성이다’, 실체는 속성들이 아니면 구축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체가 양태들이다’ 이 또한 개념적 층위는 다르지만 양태들이 아니고서는 실체가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성립한다. 어쨌든 실체-속성-양태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실체라는 것이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생산하는 관점에서 능산적 자연은 실체고, 생산되는 관점에서 소산적 자연은 양태다. 이것 또한 개념상의 구분이지, 다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동일성을 갖는다. 변용하는 동시에 변용되는 존재들이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양태와 속성과 실체의 동시성을 함께 설명해야만 생성, 변화, 소멸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계속 존재하며 지속해가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自然이 그러하듯이, 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양태들의 세계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저절로 이것이 스피노자가 생각한 결정론적 세계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수동적인 것일까? 채운샘은 어떤 이론을 구축하고 개념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윤리적 질문을 담고 있는 것이고, 자기 원인과 실체와 속성과 양태를 동일성으로 설명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양태 자체에 내재된 자유 양태 자체의 능동적인 역량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채운샘에 따르면, 실체가 하나라는 말은 이것 외에 다른 지평이 없다는 것. 즉 내재적 지평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태들의 세계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그 역동적인 세계의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 실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실체-속성-양태의 개념 규정이야 말로 모든 존재하는 것의 내재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인 동시에 어떻게 유한한 양태들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능동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내재성이란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자기 바깥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다는 것으로 양태와 실체의 관계를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신은 모든 것들을 생산하는데 그 생산하는 것들 안에 신 자체도 계속 역동적으로 생산된다. 즉 신은 생산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재적인 원인이다.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변용하고 변용되는 존재들이다. 물체들의 본질은 타자성을 내 안에 이미 수용하는 것으로 변용하고 변용될 때 본질 속에는 이미 존재하게 하는 외재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채운샘은 ‘음식’의 본질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어떤 음식이라는 개체는 이것이 약인지 독인지 미리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 또한 약을 먹기 전에 이 몸이 어떤 몸인지 미리 알 수가 없다. 음식과 몸이 만났을 때, 그 몸이 변용되고 변용하기라는 과정을 통해서 약으로 혹은 독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체의 본질은 외재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독특한 실재다. 독특하다는 것은 어떤 개체와 만날 때 우리 몸이 반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고, 이렇게 지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외재적인 인과관계들이 우리의 개체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체들은 A가 먼저 있고 B가 있어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이지도 않다. 개체의 본질을 실현시켜주는 복잡한 변용들이 먼저 존재한다. 같은 조건에서도 관계 맺고 변용되는 양상이 다 다르다. 그렇게 변용되는 다른 양상으로 우리는 독특하게(singular) 존재한다. 동일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개체들은 단 하나도 없다.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양태는 또 다른 것에 의해서 규정되고 실존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또 다른 것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관계 속에서 변용하고 변용된다. 무안하게.

실체와 속성과 양태 세 가지는 결국 같은 운동 안에 있다.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속성, 속성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양태. 그런 양태의 끊임없는 변양. 이것이 속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고 그런 속성으로부터 우리는 또 신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 3

  • 2017-05-30 11:17
    스피노자의 개념들은 언제나 잡힐듯 말듯 한 것 같습니다. 개념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머리를 굴려보는 수밖에 없겠죠... 확실히 실체-속성-양태가 동일한 운동 안에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동일한 운동 속에서 각각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네요ㅎㅎㅎ

  • 2017-05-30 11:47
    실체-속성-양태 이런 복잡한 철학을 왜 굳이 생각했을까 싶으면서도, 아마도 스피노자한테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나온 것이겠죠? 왜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춰버리는 이런 태도가 스피노자와 저의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네요. ^^;;

  • 2017-05-30 21:07
    음식은 약인지 독인지 미리 정해져 잇지 않지만 변용되는 양상으로 독특하게 존재하는 것...이런 비유로 스피노자의 개념을 조금씩 이해하면 잡힐듯 말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