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12.13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12-06 23:05
조회
240
어느새 배운 괘가 56개가 되었습니다. 중천건과 중지곤을 중얼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남은 괘가 여덟 개 남았네요. 간식도 괘도 점점이 먹고 배우는 팀주역입니다. 이번주는 뇌택귀매(雷澤歸妹), 뇌화풍(雷火豊), 화산려(火山旅)괘를 배웠습니다, 우레가 치는 괘가 두개, 불이 난 괘가 하나. 모두 번쩍거리면서도 밝은 괘들입니다. 이 세 괘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뇌택귀매에서 '귀매'라는 이름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귀(歸)는 '시집가다'라는 뜻입니다. 매(妹)는 여동생이란 뜻입니다. 보통 시집을 갈 때는 언니부터 가거나 여동생이 언니에게 딸려 가는데(이를 친영제도라 합니다), 귀매괘는 그 순서와 관습을 따르지 않고 감정이 앞서서 여동생이 먼저 남자를 만나고 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겁니다. 근대에서는 남녀관계가 감정으로 결합되는 게 자연스럽지만 고대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녀의 결합은 공적인 문제였고, 여자의 교환을 통해 집단의 재생산을 꾀하는 것이었죠. 따라서 마음만 앞서는 관계는 일단 바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즉 귀매괘는 자리도 마땅하지 않은데 마음만 기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상전에 따르면 귀매괘의 미덕은 영종지폐(永終知敝)입니다.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음을 알아서 그 끝을 영구하게 할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보통 '모든 것은 결국 끝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걸 말로만 되뇌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다 끝이 있다'고 하며 두려워하거나 허무해 하는 반면 후자는 계속하여 오래 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끝이 또 다른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죠. 관계의 바르고 오래할 수 있는 방도란? 귀매는 무조건 가까이하고 친히 하는 것이 오랜 관계의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가령 구이효는 스스로는 양강하지만 응하는 효(육오)가 음유한 자질이라 괜히 마음만 앞서는 자이고, 따라서 바른 관계를 형성하기 힘듭니다. 이때 구이효가 취하는 방법은 자신과 응하는 효에게 무턱대고 친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희의 주가 생각해 볼 여지를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친압함을 떳떳하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정정(貞靜)함을 떳떳함이 변한 것이라고 여기니, 이것이 바로 항상하고 오래하는 도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 마음이 앞서 친한 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봅니다. 귀매괘에서는 남녀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그런 마음만 앞선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죠.


뇌화풍은 번쩍거리면서 밝은 괘입니다. 우레도 치는데 불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떠서 만물을 널리 비추는, 밝고 풍요로운 상입니다. 그런데 이 '중천에 해가 떴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천에 뜬 해는 기우는 것만 남았기 때문이죠. 즉 풍요로운 때는 이 풍요로움을 잘 갈무리해서 골고루 나눠줘야 하는 것을 걱정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신속정확한 집행이 생명이지요. 대상전을 보면 군자가 절옥치형(折獄致刑) 한다고 나옵니다. 법제도를 잘 정비해서 풍요로움이 고르게 나눠질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국가의 행정력이 중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풍괘에서는 상하간의 자뢰(資賴)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서로 힘입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죠. 위에서는 아래가 잘 실행하도록 배려하고 아래에서는 위의 명령에 따르는,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균등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풍요로운 때를 잘 구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역>에서는 얼핏 보면 좋아 보이는 상황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는 효가 많이 나오는데, 풍괘 같은 경우는 이 균등함이 가리워지는 경우를 경계합니다. 가령 육이괘는 차양을 덮어 골고루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경우를 경계하고, 3,4괘도 모두 그런 식으로 효가 진행됩니다. 풍괘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골고루 나눠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상육효가 그 절정입니다. 집을 대궐같이 지어놨지만 3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오지 않는 흉한 경우죠. 이 풍요로운 때 자신을 낮추고 모두에게 나눠주지 않고 오만하게 군 결과입니다. 아무리 큰 집을 지어놓은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히려 큰 짐이 되고 말지요. 풍괘는 좋은 때를 만날수록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는 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르게 살아라', '경계하라' 라고 해도 우리 감각에서 <주역>을 읽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경험이 너무 다릅니다. 옛날에는 10대면 결혼해서 애를 낳고 다른 사회의 일원이 되는 전환점을 맞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관계의 장이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주역>을 만나야 하는가... 채운샘은 이 일천한 경험을 만회(?)하려면, 소설의 인물이나 본인이 아는 위대한 인물의 생애와 괘를 매칭해 보는 작업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령 스무살이 넘도록 부모 밑에서 사는 우리와, 십대에 이미 결혼해서 애까지 있고 그걸 다 버리고 출가를 감행한 붓다의 삶, 스케일부터가 다릅니다. 이러한 붓다의 삶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괘 중 하나를 꼽으라면 화산려입니다. 화산려는 나그네의 괘입니다. 산에 난 불이 여기저기 옮겨붙는 것처럼 끊임없이 옮겨다니는 나그네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사실 끊임없이 자기 터전을 찾아 떠도는 이주민들의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화산려의 대상전은 '형벌을 쓰는 것은 삼가고 옥사는 지체하지 않는다'라고 나옵니다. 이는 국경을 넘나드는 이들에게 나라가 취해야 할 도리죠.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이들에게 까다롭게 굴면서 계속 억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나그네가 갖춰야 하는 미덕은 바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죠. 채운샘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자기 눈을 찌르고 테베의 왕 자리에서 내려온 오이디푸스는 말년에 콜로누스에 당도합니다. 이때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받아준 그 고장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요. 그런 나그네에게는 도움의 손길과 머무를 자리가 마련됩니다. 나그네라고 그저 정처 없이 떠돌 수는 없지요. 오히려 나그네이기에 반드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때 나그네는 겸손한 태도 그리고 자신의 마땅함을 겸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에게는 나그네의 도리가 있는 법! 려괘의 효는 그 도리를 하나씩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을 받아준 거처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떳떳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육오괘는 문명(文明)의 덕을 지키는 모양입니다. 육오괘는 군주의 자리이지만 나그네이기 때문에 군주의 뜻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즉 자기나라의 영토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떳떳함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채운샘께서는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가 이 효에 부합한다고 하셨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인도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나서 한 것은 티벳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 아닌, 학교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티벳의 정신을 계승, 전파한 것이죠. 그야말로 나그네의 도리를 멋지게 보여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주역 괘를 배우고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었습니다. 훈샘의 스페셜 토마토 파스타를 흡입하고 다시 앉아 <시몽동, 개체화 이론의 이해>를 오랜만에 펼쳤습니다. 시몽동은 신체과 정신은 개체화 과정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시몽동에 따르면 생명이란 계속되는 문제상황에 대한 해결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정신이란 독특한 해결과정이자 집단적 개체화를 동반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지금 내가 지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은 계속해서 외부적인 것을 통합하고 그 지각이 불러일으킨 느낌을 통합하고 해석해 정념으로 느끼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이성과 충동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놀고 싶은데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하며 전자를 충동의 영역으로 후자를 이성의 영역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둘 다 충동의 영역이며 신체적 차원에서 지각하고 정념을 느끼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잠재성 속에는 사실 모든 충동이 다 있다고 합니다. 다만 아직 발현이 안 된 것일 뿐이죠. '놀고 싶다'는 충동이 지배적이고 '공부해야 하는데'는 무척 작은 충동인 것입니다. 작은 충동일수록 당위적으로 표현되고요. 그럼 '공부'가 지배적인 충동이 되려면? 니체식으로 말하면 그 충동에 지속적으로 먹이를 줘서 키워야 합니다. 이 먹이를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체의 차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신체는 결단하고 정신은 그에 따라붙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이 신체적 결단은 시련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죠. 늘 놀던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시련이 없이 그 지배적인 충동이 사라질 리 없다고 말입니다. 필요한 건 시련의 시간! 시몽동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변환성(정념의 변환성)을 더는 작동시킬 수 없을 때 정념성은 생명체 속에서 중심 역할을 벗어나 지각/행동적 기능들 주위에서 정돈된다." 문제상황을 맞닥뜨릴 때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를 꾀할 때 우리의 정신적 개체화도 다르게 이루어진다는 것. 이를 잘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은 손(巽), 태(兌), 환(渙)괘 읽고 정리해 오시고, 각자 어떤 괘로 에세이를 쓸지 '나만의 괘' 2개를 정해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점치는 것을 연습할 예정이니 준비해 주세요~

간식은 영주샘입니다.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1

  • 2020-12-08 00:27
    지금 제가 읽은 것이 지난주가 아니라 다음주 공지 맞는거죠? 와 이런 신속함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요?ㅋㅋㅋㅋ
    만남의 기쁨이 오래도록 지속 되길 바란다면 그 만남도 끝나고 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늘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귀매괘,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어 밝고 풍요로울 그때가 바로 기울 때임을 염두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잽싸게 처리하라는 풍괘, 마지막으로 이전의 자리에 누렸던 타이틀을 내려놓고 떠돌다 자신이 의탁하게 되는 그곳에서 겸손하되 위엄을 잃지 않는 려괘까지. 또 한가득 삶의 지혜를 퍼왔네요.
    하지만 배운 것을 몸으로 직접 실험하는 것까지 해야 제대로 공부가 된다는 것을 시몽동님 책을 통해 간단히 설득당할 줄은 몰랐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