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4학기 3주차(10.31)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10-28 22:11
조회
118
 

“니체에게 있어 명석함·착란·음모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를 형성한다.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이제부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된다. 니체의 사유가 착란을 내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병리학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사유가 대단히 명석하기 때문에 착란적인 해석의 양상을 취하는 것이다.”(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9쪽)

 

클로소프스키에 따르면, 니체의 사유는 “하강하면서 비로소 상승하고, 후퇴하면서 비로소 진보”(같은 책, 10쪽)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강하는데 어떻게 상승하며, 후퇴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진보일까요? 이것은 위에서의 설명, ‘그의 사유가 대단히 명석하기 때문에 착란적’이라는 설명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유의 명석함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착란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담으로, 제가 코코 세미나에서 배우고 있는 데카르트는 객관적인 3차원 공간에 객관적인 사물이 존재함을 증명하는데 그 증명의 근거는 자신의 명석 판명한 사유였습니다. 데카르트의 명석함과 니체 사유의 명석함.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구획하고 기계적 질서를 부여하는 명석함과 ‘자연에 질서가 있다는 말을 경계하자’며 참된 세계와 더불어 가상 세계까지 없애버리는 명석함. 대체 니체의 명석함은 어떤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석함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이번 주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정상성 자체가 하나의 병적 상태”라는 채운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정상성을 가지고 있는 게 병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서나 이런저런 정상성을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외모, 성, 지능, 국적, 인종, 나이, 건강 등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에 대한 일정한 규정성 혹은 표상입니다. 그런 규정성과 표상은 어떤 것이 그것이어야 하고 저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사물을 분별하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움푹한 원기둥형 조형물을 보고서는 ‘컵’이라는 언어와 함께 그것의 목적과 용도, 즉 개념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꽃을 키우는 화분으로 쓰이거나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로 사용될 때조차도 말이죠.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컵으로 인지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개념, 언어, 이미지 등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물과 동시에 그것이 연상시키는 개념, 즉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고 고정되어 있는 의미인 ‘존재’를 봅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자세히 보면 우리의 규정성을 벗어나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견고하게 장착하고 믿음의 체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경향이고 그것은 일종의 병입니다.

니체는 유고의 한 구절에서 데카르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유가 심지어 현실적인 것의 척도라는 사실,―사유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도덕주의적 맹신의 야만적 극치이며, 그 자체가 우리의 경험이 매 순간 반대하는 미친 주장이다.” 세상에 우리에게 명석 판명하게 사유될 수 있는 것, 즉 의심될 수 없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미친 주장입니다. 우리가 이미 통과하고 있는 경험 자체가 매번 우리의 작은 규정성 자체를 넘어가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방금까지 가지고 있던 목표나 의욕이 바로 다음 순간 바뀌어버리는 우리 마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민하게 보고 명석하게 생각해본다면 세상에 우리의 의도와 규정성으로 묶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것도 실체성을 가지고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식에 나타나는 현상(표상)과 이것이 나타나는 현상의 본 모습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니체의 사유가 착란적인 것은 바로 그 어떤 규정성도 세워질 수 없는 심연까지 내려갔기 때문이며, 동시에 명석한 이유는 그로부터 우리의 분리되고 고착된 사고의 패턴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충분히 명석하지 못하고 병리학적인 것은 바로 우리가 구성한 인간적인 정상성의 세계입니다.

정상성의 병. 저는 이것으로부터 니체가 마지막까지 싸워온 원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원한은 우리말에서처럼 대상을 향한 복수심이라는 좁은 의미로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르상띠망(resetiment)은 기억된 감정과 판단의 리플레이입니다. 니체는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일종의 원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들뢰즈는 원한을 “일반적으로 질병을 정의하는 간단한 표현”이라며 그 의미를 인간 사유의 특징으로까지 확대합니다.

“진실로 말해서, 우리는 원한 없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다. 현존을 비난하지도 비하하지도 않을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 것인가, 그를 여전히 인간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는 이미 인간과는 다른 것, 거의 초인이 아니겠는가?”(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79쪽)

우리의 편협한 표상과 기억을 가지고 어떤 것이 우리의 기대한 대로 되고 우리가 예상한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지 않는 세상과 자신에게 화를 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삶의 어떤 국면을 비방하고 증오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원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뿌리는 우리가 이미 세상에 부여해 놓은 선판단들, 즉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는 규정성과 정상성들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수준에서 인간적인 것의 수준까지 너무나도 뿌리가 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성한 세계와 세계의 본 모습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죠. 그 때문에 원한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 두터운 가치들과 정상성을 깨고 부순다는 일은 우리에겐 착란과 카오스로, 병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심하게 아팠을 때조차 병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니체로부터 무엇이 건강이고 병인지, 명석함이고 착란이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명석함이란 개념은 칠흑 같은 어둠을 끊임없이 직시하고, 따라서 그것을 끊임없이 긍정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니체와 악순환, 10쪽)

 

다음 시간에는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와 <니체와 악순환> 1장을 읽어옵니다. 조별 과제와 개인 과제도 계속 진행해주세요!

간식은 조율샘과 은옥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토요일에 뵈어요!!

 
전체 2

  • 2020-10-29 10:42
    우리가 구성한 인간적인 정상성의 세계,,이게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너무나 고정적인 척도로 작용해서 어떻게 그 안에 있으면서도 편협함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나 고민이 됩니다. 근데 데카르트 나오는 유고, 언제 쓴 유고인가요?

    • 2020-10-29 22:28
      유고 1885~1887 133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