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4학기 7주차(11.28)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11-25 23:27
조회
297
“내 실존은 끔찍한 짐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러한 고통과 거의 완벽한 체념의 상태 동안에 지적이고 도덕적인 영역 안에서 아주 유익한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래전에 그것을 던져버렸을 것입니다.”(‘O.아이저 박사에게 보낸 편지’,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그린비, 43쪽)

<아침놀>을 쓰고 있던 1880년 1월의 제노바에서 니체는 스스로 생명력이 가장 낮은 상태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한 병을 경험합니다. 어떤 병이냐구요? 의사도 모릅니다. 유전성 혹은 매독에 의한 전신마비로 추측되나 그 원인은 알 수 없고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은 물론,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심지어는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두통과 멀미가 지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격렬한 발작과 반마비상태가 번갈아가며 그를 엄습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의 발작은 삼일 밤낮을 토하게 해서 나는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누구나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구토가 올라오는 상태는 말 그대로 고문이며, 공부고 돈이고 음식이고 모든 것이 불필요해집니다. 사유나 이성적인 판단은커녕 당장 이 혐오스런 병증이 좀 가라앉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런 구역질이 삼일 밤낮을 이어진다면, 자루처럼 널브러져 실존을 저주하는 일에조차 지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의 완벽한 체념의 상태와 밑바닥의 생명력 속에서 니체는 ‘아주 유익한 실험’을 시도합니다. 그렇게 아프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을 실험이자, 그 모든 절망과 고문을 이겨낼 수 있는 실험. 놀랍게도 니체는 그 시기 자기 사유의 명철, 명랑, 풍부함이 극도의 심적인 약함과 양립할 수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나는 내 삶의 어느 때보다 정말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이 행복은 훗날 돌아본 것이 아니라, 삼일 밤낮을 토하던 그 시기에 쓴 편지의 말입니다. 대체 이것은 어떤 수준의 병약함 혹은 건강함일까요? 니체에게 앓는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니체와 악순환> 2장을 읽으며 저는 전에 강의에서 들었던 ‘우리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를 사는 것’이라는 다소 묘한 표현이 조금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마비 상태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되찾자마자 그는 이 사유의 중간상태를 기술하려고”(47쪽) 합니다. 그리고 그 기술하려는 시도 자체는 또 다른 통증을 야기합니다. “‘두뇌의 에너지’를 몇 분, 몇 십 분 동안 사용해 고통스러워하는 두뇌로부터 그 사유를 뽑아내는 것”(41쪽)이 니체가 말한 그 유익한 실험이었습니다. 여기서,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도 거기서 깨어나는 것도 니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마치 무두질되는 가죽처럼 니체를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은 바로 삶입니다. 니체가 할 수 있고 해왔던 일은 그 틈새를 기록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쓴 글을 읽을 수도 없지만 그 말할 수 없는 체험을 갈겨쓰는 것. “언어로 전도된 ‘두통’” 혹은 “두통의 언어적 번역”(38쪽) 비록 언어화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 그 사유할 수 없는 “고통을 사유하는 것, 지나간 고통(사유하는 것의 불가능성으로서)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처럼 느껴진다”(47쪽)는 니체의 병-앓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발명해내는 것 같습니다. 고통으로 얼룩진 자리에서 나타나고 그 고통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건너갈 수 있고 나아가 그것에 감사할 수 있게 하는 즐거움이란 대체 어떤 즐거움일까요?

“매순간 두뇌에는 다소 강렬한 자극이 유입되므로, 그중 수용한도를 넘어서는 것은 끊임없이 걸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자극은 이미 흡수된 옛 자극들에 의해서) 걸러져야 한다. 새로운 자극은 선택적 동화에 의해서만, 즉 낯선 것과 ‘습관적인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과거의 자극과 조정될 수 있다. 그 결과 경계선은 지워지지 않을 수 없다. 몇 초 후 두뇌의 주요부분이 잠든다. 모든 결심, 행위를 실행할 수 있기 위해 행위를 더 이상 사유하지 않기로 한 모든 결단, 이런 것들이 암시하는 바는 과거의 자극의 흔적만이 용인되며, 그것이 자아의 동일성의 영속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신체의 침묵 덕분에, 우리는 신체를 소유하여 그것이 직립을 유지하도록 하고, 그로부터 우리는 사유와 행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방향과 목적의 이미지를, 즉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56쪽)

채운샘은 강의에서 니체가 병의 체험에서 신체의 편을 들었으며, 그 병을 사회적이고 두뇌적인 사고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신호이자 전환점으로 삼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의 편에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의식은 특정한 자극들을 선별 취합해 자아의 동일성을 유지시키고 거기에 머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변하는 충동들의 복합체이며, 언제나 의식의 수용한도를 넘쳐흐르는 힘들과 관계 맺으며 변형시키고 변형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머무르려는 의식과 변하려는 신체가 있으며 우리가 겪는 모든 번뇌는 이 둘의 간극에서 생겨납니다. “고통은 기능들의 투쟁, 신체에 예속되어 서로 적대적이 된 충동들(내게 속하는 것들과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들)의 투쟁”(53쪽)인 것이죠. 우리는 보통 이 괴리에서 의식의 편을 듭니다. 그 결과가 ‘나’에 대한 상과 사물들에 대한 분별, 언어, 도덕인 것이지요. 하지만 니체는 이 투쟁에서 신체의 편을 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신체의 편에 설”(48쪽) 수 있음, 그럼으로써 동일성을 구축하려 하고 일관성을 이어 붙이려고 하는 의식, 자아, 두뇌의 머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니체는 행복감을 느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니체의 병-앓기로부터 긍정이라는 것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엄습하는 두통을 겪는 한 니체는 비극의 탄생과 같은 긴 호흡의 논문형 글쓰기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유는 뚝뚝 끊겼을 것이고, 책상에 앉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편지에는 실제로 그랬다고 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거기서 쓰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의식의 안정된 리듬이 끊어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유와 글쓰기를 합니다. 선명한 의식의 막이 걷히고 드러나는 복수적이고 미세하게 경합중인 복수적 충동들에 대해 쓰는 일을 시도합니다. 그럴 때 병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벽이 아니라 뒷문이, 강물이 아니라 다리가 됩니다.

“이제부터 저는 제 자신의 의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단지 자신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좋은 의사였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이제부터 다가올 길고 긴 고통의 시기에 대해서 저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45쪽)

채운샘은 우리는 니체가 그런 것만큼 자기 자신의 병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겪는 문제 상황을 어디에도 머물지 않을, 사회적인(두뇌적인) 사고로 돌아가지 않을 신호와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니체의 병과 같은 끔찍한 고통에 비해서는 작다고도 할 수 있는 삶에서의 문제들을 부정하고 없애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종종 에세이도 그런 식으로 문제 상황을 제거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병과 문제를 겪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니체에게서 배워야 할 능력은 바로 그런 전환인 것 같습니다. 병을 고쳐보겠다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장하고 항상 그것을 맞을 수 있는 삶에 대한 경외를 갖는다는 것. 언제고 그것은 나를 내가 예상치도 못한 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으며, 그곳이 그렇게 유쾌하진 않을 수도 있음에도 그 자리에서 뭔가를 시작하는 것. 긍정의 이미지는 바로 이런 회복력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때의 회복은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감이 아니라, 그 폐허의 자리에서 잔해들을 재료로 삼아 뭔가를 짓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기. 우리가 니체로부터 단 한 가지를 훔쳐낸다면, 바로 이런 의술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훔쳐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한 니체는 좋은 의사일 수 있을 것입니다.

벌써 에세이 발표가 3주 앞으로 다가왔네요!!(으악!)

다음 시간에는 3분의 1 이상을 써오셔야 합니다. 본론을 설명조로 채우지 말고 니체의 비전 속에서 자기 문제를 끌고가기 라는 당부도 있었네요.

간식은 희진샘과 경희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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