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4학기 6주차( 11.21)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1-15 22:14
조회
250
이번 주에는 클로소프스키의 《니체와 악순환》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니체의 흥미로운 점은 어떤 시대에 누구에게 읽히느냐에 따라서 그의 사유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니체의 사유에는 제도화를 허용하지 않는 힘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하나의 과목으로 가르쳐지기가 너무나 힘들죠. 그래서 니체에 대한 중요한 해설서들도 니체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해설자의 질문 속에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의 책이 그랬고, 클로소프스키의 책도 마찬가지죠. 니체 철학의 권위자 같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니체는 자신의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도주로를 마련하고 있는 사람들과 가장 강렬하게 접속되는 것 같습니다.

클로소프스키가 니체 해석에 있어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우선 그가 니체를 나치즘적 해석으로부터 구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들뢰즈가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란 ‘권력’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복수적이고 조형적인 디오니소스적 의지라는 점을 밝히면서 그렇게 했듯이,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철학이 동일화의 논리를 해체하는 차이의 사유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니체를 파시즘에 대립시키는 것 같습니다. 《니체와 악순환》은 니체 철학의 중심 개념을 힘의지로부터 영원회귀로 옮기고, 둘째로 니체 철학에서 병과 광기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책이라고 합니다. 채운샘은 강의에서 클로소프스키가 니체의 병과 광기를 사유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니체의 삶에서 병과 광기는 그의 삶의 한 에피소드 정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또 그의 사유에서 병과 광기는 사유를 가로막는 장해물도 아니고 철학의 결함이나 한계 같은 것을 보여주는 증거도 아닙니다. 클로소프스키가 강조하는 것은 니체 철학에서 병과 광기가 적극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니체의 광기는 니체의 명석함과 분리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의식에 대한 니체의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의식은 유기체에서 가장 뒤늦게 발전된 것이며 따라서 가장 미완성이고 가장 무력한 것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11절)

니체에 따르면 의식은 유기체에서 가장 늦게 발전된 것입니다. 의식은 항상 ‘나중에’ 옵니다. 니체는 종종 우리의 모든 활동에서 의식이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음식을 소화시키고 두 발로 걷고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과정들은 의식의 개입 없이도 너무나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의식해야 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조차 없겠죠. 물론, 인간은 늘 의식으로 세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의식은 온갖 정념과 고통의 원인일지도 모르지만 깨달음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 ‘나중에’ 온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의식이 나중에 온다는 것, 의식이 미완성이며 무력한 것이라는 것. 이는 의식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은데, 의식은 운동 중인 세계를 스냅사진처럼 찍어서 그것이 세계의 본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에 고착됩니다. 이렇게 의식과 기억에 고착되어 있는 상태를 불교에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식의 가장 거친 수준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자는 나쁜 사람이고 나를 기분 좋게 해준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유아적인 사고방식. 사실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세계의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것일 터인데, 이러한 거친 수준의 의식은 그것을 대상에 투사하여 ‘현실’로 출현시킵니다. 또한 이러한 차원의 의식은 사회적 규범과 일치합니다. 니체는 “의식 일반은 오로지 전달의 필요에서 오는 압력에 의해 발전된다”(《즐거운 학문》, 354절)고 말한 바 있죠. 철학의 유일한 기능 혹은 효용은 이러한 의식적 규정들을 넘어감으로써 의식이 만들어내는 믿음의 체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준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지식의 총체, 즉 가르치고 배우려는 의도)는 영혼의 음조의, 그 강도의 반대물이다. 이 강도는 가르쳐질 수도 배워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는 더 많이 축적될수록, 더 스스로에게 예속된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물인 영혼의 음조의 말없는 강도도 함께 증대된다. 그래서 최후에는 영혼의 음조가 교육자를 기습해서 결국 교육하려는 의도를 꺾어버린다. 이렇게 문화의 예속성은 니체의 담론의 침묵과 부딪히는 순간에 폭발한다.”(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그린비, 12~13쪽)

본질적인 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이것이 니체의 광기에 대한 클로소프스키의 해석입니다. 의식으로 포착될 수 없는 지점, 개체적 규정성들이 작동하지 않는 차원에 대한 지각과 사유. 이것이 니체의 광기이며 니체가 사유에 광기를 도입하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니체는 언어를 기존의 코드를 허무는 역설과 패러디의 방식으로밖에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클로소프스키에 따르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이러한 차원, 세계와 자아가 구분되지 않는 미세의식의 차원에 대한 사유입니다.

채운샘은 에세이를 쓰는 동안 우리가 마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굴고 있는 지점과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고 있는 어떤 전제들이나 인과들, 관념들을 미세의식의 차원에 입각해서 이해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를 똑같은 질문의 구도와 습관적인 이해방식에 가두고 그리하여 그로부터 발생되는 원한이나 가책, 슬픔의 정념들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도록 하는 전제들이 어떠한 의식적 조작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 즉 발생의 차원 속에서 우리의 편협한 관념들을 점검해보는 것. 이것은 또한 이상주의/허무주의와 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상주의와 허무주의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의미’가 주어져 있다는 데서 출발하는 사고방식이니까요.

다음 주 공지입니다. 우선 과제는 서론과 개요를 완성하는 것입니다(어제 미진한 부분을 지적받으신 분들은 서론 고쳐서 숙제방에 따로 올려주시구요). 각자의 팀 작업은 영원회귀 팀을 참조하여(?) 금요일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시면 됩니다. 다음 주에는 읽어올 텍스트도 있습니다. 《니체와 악순환》 2장을 ‘주의 깊게’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현주샘과 정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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