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8/19 후기

작성자
경숙
작성일
2020-08-24 15:51
조회
109
 

지난 시간은 "利를 어떻게 다르게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과제로 토론 수업하고 들뢰즈의 "생명을 어떻게 사유할수있을까"에 대해 수업했습니다.

 

정치에서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복지라는 이로움을 추구하지 않는 정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진짜 이익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개체에게는 자기를 보존하려는 코나투스가 있습니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조차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 합니다.  또 스피노자에 따르면자기의 역량이 커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체는 단독으로 살 수없기 때문에 죽을지 모르는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타자를 만납니다.  이렇듯 개체는 외부성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개체들의 관계를 상호 외재적 으로 보느냐, 아니면 우리가 타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내재적일 수 밖에 없느냐에 따라 출발점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역량을 사유할 때 이 역량을 내재적 지평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역량 자체가 구성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조차 거기에는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이 이미 작동합니다.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고자 할 때 그 물질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소유하려고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가?  왜 그것을 좋은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가?  왜 사람들은 저 물질에 대해서 이런저런 공통적인 관념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이 관념을 자연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공동체의 배치구조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문제삼아야 합니다.  맹자는 그 이익이 만들어진 척도를 문제 삼습니다.  그 욕망이 발현되는 방식은 우리가 갖고 태어난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됩니다.  어떤 것이 이익이다를 구성하는 것은 가치 구성 또는 가치 척도의 문제입니다.  맹자는 이익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익을 구성하는 방식을 비판합니다.  그것이 "정말 모두에게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이익이냐"는 근본적인 것을 묻습니다.

 

유학은 철저하게 공동체주의입니다.  농촌공동체입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깨지면 국가는 있을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삶의 근거입니다.  지금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나의 연결고리입니다.  맹자는 공자의 말씀을 정전으로 삼아서 어떻게 백성들의 삶을 항산 항심하고 안정된 정치를 행할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스피노자 역시 국민들이 자신들의 코나투스를 유지하는 한 에서만 국가가 실존한다고 말합니다.  국민들이 자신의 역량을 통해서 자신들의 실존을 펼쳐가는 한 에서만 권력도 존재할수 있습니다.  통치자의 권리는 백성들의 역량을 계속 가능하게 해줄수 있는 역량입니다.  그런 한에서 백성들은 왕을 지지합니다.

 

공동체의 삶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유가는 출발점과 귀결점이 모두 인간입니다.  정치의 본질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유학의 정치론은 한마디로 인본주의 입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결국 인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공손추 장구 하'에 '天時地利人和'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같지 않고, 땅의 이득은 사람들의 人和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天時는 천지의 운동성이 만들어내는 삶의 조건 생산의 조건입니다.  地利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조건 즉 환경을 말합니다. 그런데 天時나 地利는 人和만 못합니다.  人和는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입니다.

 

군주가 부적합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적합한 관념의 사람들과 관계하고 적합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적합한 관념을 가진자 들과 연대합니다.  적합한 관념을 가진 군주가 설령 부적합한 관념을 가진 자들과 관계하더라도 군주는자기 자신을 적합한 원인으로 해서 관계를 새롭게 구성해 나갑니다.  천하가 順한다는 것은 백성을 힘으로 제압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복종하게 합니다.  군주는 군주의 역량을 통해 공동체의 역량을 극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럴 때 백성은 자발적으로 복종입니다.  정치를 하는데 있어 도를 터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올바른 도를 터득한 사람에게는 돕는자가 많습니다.  이 역량을 최대화하지 않으면 통치가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해도 그것은 人爵입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벼슬은 인간의 본성, 仁義禮智입니다. 이것이 天爵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선함 성선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단순히 의식의 지평, 변용되어서 떠오르는관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관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무수한 기억들입니다.  기억은 내가 경험해서 만들어낸 관념들이 기계적으로 쌓아진게 아닙니다.  기억은 정념과 연관되면서 기억되기도하고 관념이 또 관념을 생성하면서 어떤 기억의 잉여작용을 덮어주기 때문에 문제가 더 혼잡해집니다.  인식에는 근본적으로 그 기억으로 인한 왜곡과 잉여, 조작, 창안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어떤 배치 속에서 같이작동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시대와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가 있습니다.  시대의 배치에 따라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맞닥트렸을때 그 인과를 만들어내는 회로가 너무 다릅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일단 신체와 정신을 하나의 메카니즘 속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의식 자체를 의식으로만 설명하면 안되고 무의식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들뢰즈는 발생적으로 신체와 정신을 일원적으로 설명하는 일의성을 강조합니다.  일의성은 표현되는 것에 위계 없음을 말합니다.  양태와 신의 차원, 절대적인 차원과 그 유한하게 나타나는 것들의 차원의 일의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관념과 나의 신체성으로 표현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것은 나쁜 것을 몰아내고 좋은 것만을 생각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적 주체의 의식적인 자기 변화가 왜 성립할 수 없는가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아야 실천하는것이 아니라 둘은 동시적인 것입니다. 실천을 하지 않으면 관념 자체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두 축을 가지고 들뢰즈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정신과 신체가 한 치의 위계도 없이 동일한 신의 자기표현일까?

 

생명은 모든것을 포함합니다.  신체적인것, 비신체적인것, 원리적인 차원, 형상적인 차원도 포함합니다.  생명은 너무 분명합니다만 어디에 지시될 수 있는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을 사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잘 살고 잘 죽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어떻게 사유할 수있나?  들뢰즈는 그런 문제로 끌고가는 것 같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신이라고 하는것은 차이 자체입니다.  신과 개체를 차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개체화의 장, 개체화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개체화의 장이라는 것은 개체를 이렇게 나타나는 측면에서 보면 개체이고, 그것을 근원적인 원인의 차원에서 보면 차이 자체의 세게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주체를 벗어날 것인가?  탈주체는 정신줄을 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부적합한 관념은 주체 중심주의입니다.  적합한 관념으로 나아 간다는 것이 정신줄 놓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주체를 다르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적합한 관념을 향해 나아가는것에 어떤 도약이 필요할까요?  이 두 문제를 계속 중심에 놓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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