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3학기 에세이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9-28 09:03
조회
112
공지가 늦었습니다. ㅠㅜ 지난번에 월요일 아침 8시까지 수정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로 했는데요. 이거 공지가 늦었으니 허허... 그래도 선생님들께서 꾸준히 생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오늘은 물 건너갔으니 내일 정오까지 올리면 어떨까요? 에세이는 다음 주 수요일 7시 오전 10시에 시작합니다. 간식은 각자 조금씩 챙겨와 주세요~

 

이번 시간에는 그동안 입만 다시고 있었던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를 총정리했습니다. 읽으면서 마트롱과 마슈레가 들뢰즈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책을 조금씩 다시 읽으면서 새삼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함축적임을 다시 알게 됐습니다. 덕분에 《맹자》를 비롯한 다른 동양 고전들을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대단한 시선을 하나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

스피노자와 그를 독해하는 수많은 스피노자주의자들이 주목한 문제는 ‘기쁨의 마주침의 조직’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그것이 없으면 느껴지지 않는 수동적 정념으로서의 기쁨이죠. 혹은 나의 기쁨을 방해하는 타인의 슬픔으로부터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슬픔에 중독된 기쁨’이라고 했죠. 이런 기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슬픔으로 변용시키는 것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맞서 싸운다는 것은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관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를 읽으면서 놀라웠던 점 중 하나가 해체와 합치를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일한 활동으로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해체하는 관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와 합치하는 관계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마주침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세계가 그 자체로 어떤 결여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들뢰즈가 ‘역량’을 얘기하기에 앞서 실체-속성-양태의 구도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초월적 도덕, 초월적 올바름을 도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 “자연과 대립하는 것은 문화도 이성 상태도 심지어 시민 상태도 아니고, 오직 인간의 모든 기획을 위협하는 미신뿐이다.”(331)라고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채운쌤은 이 지점에서 ‘배움’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죠. 배움은 내가 처하는 물질적 조건을 바꾸지는 못해도 일종의 혁명적 활동입니다. 부처, 공자, 스피노자 등의 스승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은 본디 그대로였고, 우리는 신의 표현물이다’입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이들처럼 수동성이 최대화된 상태에서 코나투스를 보존하게 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이는 어떤 것이 자신에게 유용한 것인지 질문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는 수동적 존재입니다. 아무리 사고가 말랑말랑해도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미숙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가 말한 아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열심히 할수록 더 무기력해지는 역설’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피노자식으로 얘기하면,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역량과 실존이 분리되는 노력은 개체를 무지에 고착되게 만듭니다. 채운쌤은 신자유주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자들을 ‘능동성의 외피를 쓴 무기력한 자들’이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맹자가 말한 50보 100보가 이런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부에 대해 의존하는 무능력은 아무리 다양하게 보일지라도 실상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맹자가 왕도정치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양혜왕에게 50보 100보를 얘기한 것은 패도정치의 수동성을 꼬집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윤리와 정치를 관통하는 개념을 많이 얻어가게 됐네요. 덕분에 맹자가 말하는 개념들도 이렇게 저렇게 갖다 붙이는 시도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한 학기가 남았지만, 슬슬 올해 스피노자 팀의 여정도 끝이 보이네요.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잘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에세이와 열심히 씨름하시는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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