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8주차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20-09-21 16:29
조회
105
절탁S/3학기 8주차 후기/2020.9.21./윤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 친구를 만나고, 토론을 하고, 강의를 듣고, 이 후 소박한 식사와 함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규문의 절탁S 수업에 저는 한 달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오랜만에 참석했습니다. 소중한 일상을 잠시 쉬어야 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는 바람에 저는 코로나19로 확찐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달의 부재에도 이번 주 수업을 하며 제가 언제 쉬었는지 모르게 얼마나 익숙한지 이 자리를 지키며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공부의 일상도 놓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공부 공간과 친구들이 있는 저는 운이 좋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맹자의 책 읽기를 이번 시간으로 끝마치고, 한 번의 ‘들뢰즈의 스피노자’ 강의와 에세이 발표가 남아 있는 스피노자, 맹자를 공부하는 3학기는 다사다난하게 지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맹자와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이 어떤 면에서 현대 정치를 다르게 작동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모든 공동체가 제도를 더 합리적, 과학적으로 운영한다고, 그 안의 구성원들은 더 기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요즘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표면으로는 시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국회의원들은 소외된 구성원들을 위한 세세한 법리를 만들고자 애쓰고, 정치인들이 국민의 입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서로 우기고 있는 것만 보아도 맹자가 말하고 있는 민을 위한 정치가 작동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백성들은 왜 안정되고 기쁘기보다 불안하고 슬퍼 보일까요? 맹자가 말하고 있는 仁政으로 인한 드러남인 與民同樂(같은 기쁨을 백성과 함께 한다)은 요원해지고 있는 것 같으니, 공부를 하는 자 또는 수신을 하는 자에게는 지금의 정치를 다르게 사유할 강력한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수신도 독자적으로 열심히 한다고 되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치와 영성의 문제

그렇다면 점점 진보했다고 점점 민중을 위한다고 하는 요즘의 민주주의 정치가 놓치고 있어서 인간 공동체의 윤리가 기쁨을 위한 방향과는 다르게 나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진단할 때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채운샘은 영성이 없이 정치가 작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채운샘에 따르면 정치를 영성의 문제와 함께 사유할 때, 우리는 현대 정치가 가야할 방향을 다르게 틀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채운 샘은 현대정치에서 왜 영성의 회복을 말씀하게 되신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현재 공부하고 있는 맹자의 성인과 스피노자의 현자는 어떤 사람인가와 성인의 치와 현자들의 공동체를 말하고 있는 맹자와 스피노자가 공동체의 윤리를 어떻게 형성해야한다고 하는지와 맞닿아 있습니다. 맹자가 내성외왕을 스피노자가 현자들의 공동체를 治의 윤리로 가져오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가의 방향을 다르게 사유해 볼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라도 세상을 먼저 이해하는 작업, 즉 우주자연과 자연 안의 인간을 존재론적이나 인식론적으로 탐구하는 활동 없이 좋은 공동체 작동을 위한 법, 제도 등을 열심히 분석하고 종합하여 재정비하는 작업(정치적 활동)에 매진한다고 훌륭한 왕이 되거나,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맹자와 스피노자의 공통된 정치 관념입니다. 맹자는 聖人의 治(仁政)를 말합니다. 맹자의 왕도정치, 내성외왕, 즉 수신을 전제로 하는 治는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요? 맹자는 정치 지도자들과 제자들에게 이것이 백성들의 樂으로 이것이 하늘의 뜻으로 드러난다고 가르칩니다. 맹자는 중국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끈 왕들과 중국 역사에서 훌륭한 신하들 이윤, 유하혜, 백이, 공자 등 성인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士 계급의 일화와 관련하여 자신의 정치사상을 제자들과 맹자시대(전국시대)의 왕과 사 계급과의 문답을 통해 글로 남겼습니다.

결론적으로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는 성선이 내재해 있고, 성선은 인의예지로 발현된다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양태인 인간이 본성에 따라서 살게 되었을 때, 정념의 예속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구성 윤리인 정치는 인간의 본성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운용될 수 없음을 맹자나 스피노자나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맹자와 스피노자를 공부하며 治를 말할 때, 치의 문제가 존재론적 탐구와 연결되는 점에서 인간의 본성이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자연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요? 맹자와 스피노자는 천명과 신 (즉 하늘과 분리된 인간의 운명은 없고, 신과 분리된 양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일어나는 사건의 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인간 사회를 운용하면서 발생하는 문화, 종교, 예술, 제도 등도 자연에 속한 인간의 본성과 동떨어져 만들어지고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 중 어느 한 가지 분야만 치중되어 발전되었을 때, 그 사회가 어떤 사회였다고 후에 평가될 수 있을 뿐이지(미신이 지배하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제도가 작동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등), 이들 모두가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필요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적 사고가 우선시 되고 있는 21세기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인간 사회의 작동을 규명하고, 그것에 맞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오차가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운용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보에 어울리는 사회 이상에 가까이 갈수록 구성원 모두가 만족할만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회는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모든 인간 사회의 작동이 규명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은 합리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경험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신의 절대성에서 시작하지만 인간의 정념에서 출발하여 신의 절대성으로 이행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습니다. 원인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하는 인간 삶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방향(예속)으로 밀려가는 것을 원하는 인간들의 실재 행위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자신을 포함한) 정념의 메커니즘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념의 메커니즘에서 출발하는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저는 스피노자가 인간이 무조건 믿고 있는 미신을 비판하고 있지만, 인간은 원인에 대한 무지에 의해 무조건 믿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조건에서 자연스럽다는 것 또한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려할 때, 이러한 인간에게 종교(신앙)는 반드시 필요한 분야였던 것 같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의 발생을 믿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합리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인간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런 점은 인간 공동체의 기쁨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윤리를 믿고 따르게 하는 작용을 하기도 하지만 쉽게 미신으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모세의 예언이 사람들의 믿음에 의해 어떻게 유대 공동체의 윤리가 될 수 있었고, 모세가 공동체에서 예언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 원인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대중이 복종하도록 신앙은 작용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신앙의 유용성입니다. 두려움으로 복종하게 된 대중이지만, 정의로 갈 수 있는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예언가 모세에 의해 대중은 신의 섭리(영성)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신의 섭리를 따르는 방향으로 이끌릴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수동적 복종에 의한 본성에 따르는 삶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 이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적 사고의 지향으로 인해 이러한 영성은 간과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시점에서 존재론과 연결되는 정치 철학이 필요하게 됩니다. 합리적 이성(스피노자 의미에서의 이성이 아닌)에 의해 구성한 수많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정치 철학을 우리는 공부합니다. 이 철학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요소는 되도록 배제해야하는 일이 발생됩니다. 이러한 철학에서 영성은 물론 미신으로 취급될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가진 듯 보입니다. 영성은 과학의 시대 합리적 사고의 강조에 의해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인식역량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장은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적 철학(관념)의 장이 아닙니다. 인식역량의 증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번뇌가 끓어 넘치는 현존의 장에서 일어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객관적 사실을 많이 습득하여 축적한다고 우리의 인식역량이 증대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실천이 병존하는, 신체와 정신이 평행한 스피노자의 원리에 따라) 우리는 행위 하는 만큼 사유가 깊어지고, 사유를 닦는 만큼 기쁘게 행위 하게 됩니다. 실제로 겪어냄 없이는 사유 활동도 없습니다. 정치에서 영성을 함께 사유해야 하는 까닭은 기존의 정치개념이 객관적 사실로 만들어 낸 이론화(정신화)에 무게 중심이 치우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 차원에서 정치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에서 영성을 함께 사유해 보아야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예측불가능하고 규정지을 수 없지만 실제로 인간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함께 종합해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은 맹자께서 요리조리 가르쳐 주셔도 우리는 알기 어렵습니다. 성선에 대한 맹자의 정의들이 비유로 표현되고 있어서 이기도 하고, 맹자가 성선을 비유로 표현할 때 예로 드는 맹자의 맥락마다 성선의 결과가 다르게 우리에게 인식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작용하고 표현되는 것에서만 우리는 맹자의 성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선은 무엇이라고 지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작용하여 표현되면서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표현으로 신과 양태의 관계, 양태와 양태의 관계를 종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맹자의 天과 연결된 인간 본성인 성선이 어떻게 인간 공동체의 삶으로 표현되는지는 신의 섭리(영성)가 객관적 사실로 고정시킬 수 없는 다양성을 품고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맹자와 스피노자의 철학 양자에서 우리는 언어로 지시될 수 없지만 삶으로 표현되고 있는 양상이 분명히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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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2 17:41
    정치의 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내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피노자를 공부할수록 무엇이 합리적인지 계속 질문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성이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스피노자와 맹자가 보여주는 정치는 우리의 합리로만 환원되지 않지만 다른 의미에서 합리적입니다. 앞으로 정치를 고민할 때는 영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영성을 가져올지 아직도 모호하네요. 공부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