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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차 후기 및 공지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5-16 00:35
조회
107
 
“나는 『공생을 위한 도구』에 이어 이 책에서 다음 세 가지 작업을 하고자 한다.

1. 날마다 무더기로 상품을 쏟아내어 사용가치의 자율적 창조를 마비시키는 상품·시장 의존 사회의 특징을 묘사하려 한다.
2. 이 시장 의존 사회에서 필요를 만들어내며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숨겨진 역할을 파헤치려 한다.
3. 진실을 감추는 환상을 벗겨낸 다음, 시장 의존을 영구화하는 전문가 권력을 허물어낼 전략을 제안하고자 한다.” (p.17)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인 1978년에 출간되었지만, 책이 던져준 고민은 여전히 현재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위기와 불안에 한껏 예민해진 우리에게 누군가는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고 핀잔합니다. 그것만큼 익숙한 질문법은 ‘성장'인지 '분배'인지 묻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한지에 관한 일리치의 생각은 남다릅니다. 그는 무분별한 성장의 논리만큼 만연해진 분배의 관념이 인간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지를 따져 묻고 있습니다. “경제학은 대량 상품 생산자들이 사회의 지배권을 갖도록 옹호하는 선동으로 발전되었다. 사회주의는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분배구조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변질했다. 복지경제학은 공공의 이로움과 물질의 풍요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이 말하는 풍요는 미국과 유럽의 학교와 보건소, 감옥과 구호소를 떠도는 가난한 사람에게 굴욕감을 주는 풍요이다.”(p.27) 복지정책과 분배주의는 물질적인 필요를 얼마나 많은 이에게 제공하는지에 관심을 둘 뿐, 그럴수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장과 상품에 의존적으로 되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일리치는 에너지 정책을 예로 들면서, 필요에 대한 감각을 경제적인 문제로, 생산력과 풍요의 결핍으로 바라보는 사회주의자들과 자본주의 지지자들의 공통된 한계를 지적합니다.

 
“사실 현대의 경제학자는 특별한 사교 모임의 회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임에는 전문적인 일을 추구하기 위해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현대 사회의 가장 근본적 거래에 대해 사회적으로 무감하도록 훈련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 근본적 거래란 상품의 풍요가 커질 때마다 치러야 하는 가격으로,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만드는 개별·개인의 능력 감퇴이다.” (pp.34-35)

인간의 필요가 상품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일리치가 필요를 사유하는 방식은 역사적입니다. 그는 전통사회와 달리 현대사회에는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곧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으로 바뀌었음을 통찰합니다. 그러한 바뀜의 과정에는 상품과 인간의 욕구가 갖는 관계를 정당화하는 전문가 집단이 있습니다. 여기서 전문가는 텔레비전 기상 캐스터일 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일 수도 있습니다.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 사회적 자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대중을 선동하는 극좌 선동가와 극우 경제학자도 전문가 집단에 속합니다. 안정된 법과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선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육자, '건강한 출산'을 위한 의학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은 그 자체로 공인된 처방이 됩니다. 인간이 필요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법적인 허가 없이 주거할 집을 짓지 못하는 무능에서도 발견됩니다. 시장이 형성되고 각종 규제가 생겨남에 따라 이전에는 자유롭게 시도했던 많은 것이 법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땅을 사유화하지 않고 집을 지으면 ‘무허가’ 주택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토론 중에 은섭 선생님이 말해주신 경험담이 기억납니다. 은섭 선생님은 얼마 전에 정형외과를 방문해서 도수치료를 받았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치료 받았던 도수치료사는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분을 보고 찾아온 손님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어째서 따로 개원하지 않냐고 묻자, 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답니다. 아무리 유능한 도수치료사라도 의사에게 고용되어서 일할 수밖에 없더라는 것이죠. 일리치의 견해는 전문가들의 관계에서도 통용됩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규정하는 또 다른 심급이 존재하는 것은 집단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고 허가하는 과정에는 어김없이 ‘독점’이 개입됩니다. 인간의 필요를 권리에 대한 문제로, 권리를 독점의 문제로 환원하는 과정은 자원에 대한 독점 없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자본주의 내의 질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리치는 인간의 욕구를 독점하고 필요를 ‘설교’하는 전문가 집단을 사제나 신학자에 빗댑니다. 그리고 막강한 전문가를 용인하는 사회를 정치적인 문제로 쟁점화합니다. 전문가에게 합법성이 주어지는 것을 새로운 권력의 출현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삼권분립의 고유성과 배치되는 것으로 표현한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데려다 필요를 배우는데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만족에 기반해 자신의 욕구를 만드는 능력은 보기 드물어진다. 아주 부자이거나 몹시 가난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p.72)

일리치가 전문가를 문제로 삼는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가 만들어지지 않고 특정한 집단에 의해 제공되거나 ‘처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요에 중독된 사회에는 어김없이 현대화된 가난이 생겨난다고 일리치가 강조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필요를 보는 관점이 무엇을 얻기 위한 ‘권리’가 아니라,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자유에 대한 일리치의 관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감각을 바꿔놓습니다. 시장 바깥에서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빈민층들은 오히려 상품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립할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이들에게 ‘쓸모 있는 실업’은 스스로의 사용가치를 창출할 기회이자, 전문가를 양성하는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저항이 됩니다. 토론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이 점점 확산되는 요즘 현실과 청년실업 문제를 얘기한 것도 기억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업자를 무능한 존재로 보게 만드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백수는 사회적으로 딱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한편, 우리의 일상 속에 AI가 개입할 것이 많아질수록 인간들도 점차 의존적으로 되어갑니다. 이것이 희망일지, 절망일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백수는 자신의 쓸모를 언제든지 사회적으로 용인된 공간의 밖에서 실험할 조건들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쓸모’에 대한 관념이 이미 사회적으로 용인된 개념은 아닌지 고민해봅니다.

이반 일리치의 문장은 복잡하지 않으며, 그의 생각은 누구보다도 명징하면서 분명한 울림으로 느껴집니다. 후기에 인용하지 못했지만, 밑줄 칠 만큼 멋진 문장이 책 속에 아직 가득합니다. 토론 끝에 일리치가 쓴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세미나를 함께하면서 이처럼 열렬한 호응과 마주한 것도 오랜만(^^?)입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시간에는 세미나에서 다룰 마지막 책이자 끝판왕,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읽습니다. 저와 민호&건화쌤이 1,2,3장을 맡아서 발제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체 2

  • 2019-05-16 10:57
    ‘쓸모 있는 실업’이라는 멋진 말을 실제적 역량으로 담보해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규문 청년들의 싱그런 모습이 눈에 환하게 보입니다^^
    훌륭하신 스승님과 서로에게 스승이 되고 있는 멋진 동학들이 함께 하는 공간이라니!!! 큰 박수로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이제 애면글면쌤도 애면글면 벗어나 '용맹정진 3년 결사' 를 발원하시면 어떠실지? ㅎㅎㅎ

  • 2019-05-16 15:33
    일리치의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설명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돌아간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요점은 상품과 전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현대화된 가난 속에서 우리 자신이 내맡겨지고 있음을, 그로부터 스스로의 사용가치에 대해 무능력해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하나씩 하나씩, 예를 들면 몸의 병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예민하게 문제제기 해보는 태도에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