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9주차 후기 및 공지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III)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5-08 20:15
조회
147
프리드리히 니체가 저술한 <도덕의 계보>에 수록된 논문들은 각각 ‘기독교의 심리학’, ‘양심의 심리학’, ‘성직자의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니체가 19세기 유럽인들에게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겨진 도덕 개념이 어떻게 기만적으로 작동하는지 분석했다면, 베버 역시 근면하고 성실함이 권장되는 윤리적 덕목에서 청교도의 금욕주의적 메커니즘을 파헤친 탁월한 심리학자였습니다. 청교도들에게 부富를 추구하려는 자세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어도, 그것이 신을 위한 영광으로 돌려진다면 그것은 권장될만한 태도가 됩니다. 마음대로 오락을 즐기려는 자세도 배격하지만, 그것이 육체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휴식이라면 허용됩니다. 하는 짓은 별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구원 가능성’이라는 명분 아래 얼마나 합리적으로 재편하느냐에 따라 각자는 윤리적으로 탁월하거나 방탕하게 보일 수 있더라는 것이죠. 논의를 따라갈수록 현세적 금욕주의의 논리는 말장난 같고, 일견 기만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칼뱅주의에서 파생된 현세적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의 속한 직업적인 본분에 충실하면서 나태함이나 쾌락주의 같이 구원을 저해하는 요인을 끊임없이 배척합니다. 이들은 내세관은 구원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현세가 내세와 비교할 때 절하되거나 부정되어야할 곳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내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낮 동안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해야’ 한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분명하게 계시된 신의 뜻에 따라 신의 영광을 더하는 데 봉사”해야하기 때문입니다.(140) 이들은 구원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현실에서 자신들이 속한 생활방식을 체계화할 필요를 느끼고, 노동하는 장을 가능한 안정적으로 조직하게끔 만듭니다. 청교도적 세계관에서 날품팔이꾼의 불규칙한 노동은,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것이기는 해도, 결과적으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어중간한 상태’로 취급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베버는 칼뱅주의에서 유래된 청교도적 윤리관에 있는 ‘세속적 금욕주의’가 서구인의 직업의식과 자본주의 정신의 합리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청교도적 직업윤리에 나타난 금욕주의적 이상이 종교적 소명에 따른 직업활동으로 합리화된다고 말합니다. 즉 청교도적 직업윤리란 현세에서 직업노동을 열심히 하고, 근검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돈을 다시 투자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소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소비의 본래 의미는 말 그대로 모은 재화를 거리낌 없이 쓰고, 낭비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소비문화는 어떨까요? 여름철이면 휴가 기간에 직장인들이 어떤 책을 구입해 읽었는지, 어떤 휴양지를 방문했는지 다룬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현대인들의 소비는 책을 읽고 여행을 가는 것도 (고상한 의미에서) 나를 위한 ‘힐링’의 일환으로, 노동을 위한 충전의 시간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휴식할 시간에 어떻게든 본전을 뽑고 그것을 다시 ‘열일’하기 위한 시간으로 쓰기. ‘나를 위한 투자’로 대표되는 관념 또한 생산에 대한 강박을 보여줍니다.

베버는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이 종교적 ‘소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신을 위한 경우라면 영리적 활동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개인들은 ‘진정 신을 위해서' 부유해지도록 노동해야 한다는 청교도적 관념을 성립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청교도적 금욕주의의 이상이 이윤추구에 대한 근대 기업가의 영리활동을 정당화하였으며 이것이 근대 기업가의 '소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청교도적 금욕주의는 부부간의 사적 관계마저도 종교적인 당위로 규정합니다. 부부간의 성관계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계명에 따라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신이 뜻한 수단으로서만 허용되는 것처럼 말이죠. 왜냐하면 “청교도들의 삶의 구석구석에 작용하고 있는 신이 그 신도들 각각에게 하나의 이윤의 기회를 준다면, 그것은 신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기독교 신자는 그 기회를 사용하여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야만”(145)하기 때문이지요. 현세적 금욕주의가 기업인들의 노동착취를 묵인하게 된다는 베버의 분석도 재밌습니다. 기업가들의 ‘소명’의식은 노동자가 자신의 업무에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고, 고용주들은 기업경영을 소명으로 여기면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부과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따라 열심히 일해서 구원받으려했고, 금욕적 태도를 엄격하게 내면화합니다. 그 결과 노동의 생산성은 엄청나게 크게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관점에서 보면, 착취는 단순히 고용주들이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들이 무고한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명’을 다한 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신의 영광을 위해 영리 활동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고, 신에게 바치는 영광의 증표인 재산이 감소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뿐입니다.

 
"현세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 낭비적 향락에 반대해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앞서 말한 의미에서)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 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육욕과 외적 재화의 집착에 대한 투쟁은, (…) 합리적 영리 활동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재산의 비합리적 사용에 대한 투쟁이었다." (문예출판사, 152)

베버에 따르면 방종에 빠진 영주나 과시적으로 허세를 일삼는 벼락부자는 금욕주의적 관점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신,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윤리적으로 탁월한 평가를 받았다고 말하죠. 오늘날에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인생을 하나의 모범으로 삼고, 부유한 기업인에 대한 다양한 성공신화를 만들어내는 풍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재화추구로 부르주아가 신의 섭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성도로 대접받은 것처럼, 현대의 많은 기업은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를 윤리적이고 공공연한 슬로건에 의탁합니다. 한때 삼성전자가 광고한 ‘또 하나의 가족’ 시리즈, 국위선양을 모토로 걸었던 CJ 그룹의 광고가 생각나네요. 토론에서 순화 선생님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에세이ㅡ‘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ㅡ를 말했습니다. 다소 촌스러운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발매되었던 당시에 백만 부가 넘게 팔렸던 베스트셀러(!)였다고 합니다.

칼뱅주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부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비난하지만, 직업노동을 열심히 수행하면 그 열매로 부가 생기고, 이것을 신의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금욕주의는 선善(정직한 직업노동)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악惡(돈에 대한 욕심)이 개입될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재밌는 것은 그러한 역설이 개인들에게 직업노동에 대한 열정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는 점입니다. 베버는 종교개혁 이전의 수도원 역사도 부의 축적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타락에 계속해서 대항해왔던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칼뱅주의 이후에 생겨난 다양한 금욕적 분파들 또한 그 연장선에 놓여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감리교의 부흥은 청교도 정신을 복원시키기 위한 운동이자, 중세 수도원 개혁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금욕적 신앙이 부의 증가를 가져오고 증가된 부가 금욕적 신앙을 무너뜨리는 역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가 증대될 때마다 종교의 내용은 그만큼 감소되었던 것을 염려한다. 따라서 나는 문제의 성격상 어떤 참된 신앙의 부흥이 오래 지속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절약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바로 부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가 증대하면 자만과 열정과 세속적 애착이 그 모든 형태로 또한 증가한다. (…) 순수한 종교의 이러한 점진적 타락을 방지할 수단은 없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절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도록 권고하고,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권해야만 한다.’” (156-157)

베버는 웨슬리가 위에서 발언했던 시점을 기준으로 ‘순수한 종교적 열광’이 정점을 찍고, 갈수록 ‘신의 왕국에 대한 추구’가 점차 ‘냉정한 직업적 덕’으로 해소되기 시작함을 역설합니다. 이제 근대 자본주의적 인간은 물질적 풍요의 수혜를 얻고 있지만, 인류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물질적인 삶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 체계를 금욕주의 정신의 도움 없이도 저절로 돌아가고 있는 자동 기계장치에 비유합니다. 직업에 대한 종교적/윤리적 소명의식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죠. 베버는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미국을 예시하면서 부의 추구가 흡사 스포츠와 같은 세속적인 경쟁심과 결합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때 청교도주의가 남긴 관성적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은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자신의 일에 기계적으로 열중하는 사람들은 ‘영혼(정신) 없는 전문가’로 남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자기만족적인 쾌락을 우선시하는 ‘마음이 메마른 향락자’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베버는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박탈당한 채로 영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전형을 ‘최후의 인간’(혹은 '마지막 단계의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니체를 만나고, 마크 피셔의 말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거운 질문의 뜻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반 일리치의 <누가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읽고 느낀 점들, 같이 나누고픈 생각을 정리해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전체 3

  • 2019-05-11 20:39
    나의 삶이 어떤 가치의 자동 기계장치인지를 되묻게 하는군요.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은 양의 노동에 자신을 내어주고 있는 삶, '그 자신의 문제에 속할 수가 없는' 삶, 신이 이 삶을 허락하셨노라. T.T

  • 2019-05-13 13:22
    베버의 책은 간명한듯 하면서도 대목마다 자본주의를 다르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영감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단순히 물질적인 체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체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공부를 하면서도 베버의 책이 자주 떠오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 2019-05-14 07:51
    ‘영혼(정신) 없는 전문가’, ‘마음이 메마른 향락자’!! 정말 이 자본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두 캐릭터네요. 이 번뇌의 자리를 어떻게 깨달음의 자리로 만들 것인가! 이것이 여전히 화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