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10.25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10-21 11:53
조회
114


11일에는 주역과 글쓰기 팀이 자진해서(!) 모여 배울 괘를 미리 예습했습니다. 그리고 18일에도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시 모여서 앞으로 배울 괘의 괘사와 단사와 상전을 읽으며, 괘가 대체 어떤 모냥인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권으로 넘어오고 나니 만나게 되는 괘사나 효사가 점점 복잡해지고 알듯 모를듯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 이전에도 몰랐지만 더 모르겠다?! ...이런 어려움을 서로 호소하는 훈훈한 시간을 갖기도 했지요. 아무튼 밤 늦게까지 <주역>을 읽으며 보람찬 일요일을 보내는 주역팀입니다.

이번 시간에 배운 괘는 천산둔(天山遯)과 뇌천대장(雷天大壯), 화지진(火地晉)입니다. 둔(遯)은 '물러나다, 피하다, 도망가다' 라는 뜻입니다. 아직 양이 우세한 상황 같지만 음유한 기운이 아래에서부터 차차 올라오고 있는 때이기도 하기에, 기미를 읽을 줄 아는 군자는 슬슬 물러서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죠. 그리고 대장괘는 필요 이상으로 힘이 강성한 때를 이릅니다. 강한 기운이 뿜뿜 올라와서 괘의 과반을 넘어 섰으므로 전체적으로 매우 강하고 당당한 모습입니다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그 강성한 기운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가 숙제로 남는 괘입니다. 마지막으로 진괘는...뭐라고 해야 할까요. 채운샘은 '동양식 진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한마디로 좋은 통치자와 좋은 신하가 죽이 잘 맞아서 밝고 아름다운 시대를 영위하는 모습입니다. '진보(progress)' 하면 전면적으로 바꾸거나 갈아엎는 등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만, <주역>의 진보는 대단히 안정된 문명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동서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세 괘를 두고 토론하면서 나온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물러나거나 힘을 제어하는 것이 그 자체로 역량의 발휘일 수 있는가'입니다. 이에 대해 채운샘은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주역>은 기본적으로 군자에게 삶의 경계가 되는 메시지를 담은 책입니다. 소인을 위한 '생활 꿀팁'은 아닌 것이죠.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바로 이치를 궁구하는 여부에 있습니다. 소인은 일의 결과에 대한 느낌으로 세상의 선악을 가르고 거기에 휩쓸리는 반면, 군자는 세상에 좋거나 나쁜 것은 따로 없다는 이치를 알면서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만약 중심이 없다면 사람은 계산하게 됩니다. 가령 둔괘를 두고 아직 양효가 음효보다 양적으로 우세하다고만 생각한다면,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려고 하다가 물러날 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중심이랄 것이 없고 단지 세간의 이익이나 손해라는 상에 자신을 맡겨버렸기 때문이죠. 빌헬름은 둔괘를 건설적 후퇴(constructive retreat)라고 번역했습니다.* 조류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다시 구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인의 물러남인 것입니다. 둔괘 구사효에서는 "좋아하면서도 은둔한다[好遯]"라고 합니다. 군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사사로운 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딱 끊고 갈 수 있지만 소인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정이천은 "도로써 욕망을 제어한다[以道制欲]"고 했는데, 이는 예기의 "以道制欲 則樂而不亂 以欲忘道 則惑而不樂"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군자는 욕망을 도로써 제어하여 즐거우면서도 어지럽지 않지만, 소인은 욕망에 빠져 도를 잊어 미혹되고 즐겁지 않다는 것. 여기서 둔괘의 물러남은 무척 적극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기운에 밀려 움츠리거나, 더 큰 일을 해보겠다고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을 새로이 두면서 쓸데없는 일을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둔괘의 물러남인 것입니다.

둔괘를 뒤집은 대장괘는 어떻게 보면 무척 좋은 상황입니다. 괘상을 보면 양효가 아래에서부터 과반 이상 치고 올라왔습니다. 워낙 받혀주는 힘이 좋은 것입니다. 이때는 필요 이상으로 힘이 좋아서, 노력한 것보다 더 괜찮은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때 그냥 자기가 잘 한 것이라 생각하며 좋아하기만 하면 너무나 자신을 과신하게 되어 화를 부르겠죠. 군자는 한번쯤 이게 정말 맞는지 되짚어봐야 합니다. 따라서 대장괘에서 요구되는 자세는 바로 극기복례(克己復禮)입니다.

대장괘는 괘사에서부터 바름을 잃지 않는 것이 과제로 나옵니다[利貞]. 또 이토록 극기복례를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을 이긴 자 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노자식으로 말하면 자승자강(自勝者强). 스스로를 이기는 자가 강하다! 정이천은 <중용>의 강함에 대한 구절을 인용하죠. 군자는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구절입니다.* 진정한 강함은 남을 제압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

가령 대장괘의 구삼효는 힘은 뻗대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경우를 버전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야가 좁은 소인은 넘치는 힘만 믿고 날뛰면서 화를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의 꿋굿한 내면을 갖춘 군자는 오히려 그때문에 상황을 무시하게 되지요. "군자가 용맹만 있고 의가 없으면 난을 일으킨다. 소인이 용맹만 있고 의가 없으면 도둑이 된다[君子有勇而無義 爲亂 小人有勇而無義 爲盜]"는 <논어> 양화편의 구절이 딱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괘는 점괘로 만나면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워낙 무난~해서라고 할까요. 태양이 지상으로 떠올라 만물을 비추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고민이 있어 괘를 뽑았는데 이런 풍경이 나오면 아무래도 당황스럽긴 하겠죠. 하물며 그 이름이 '진보'라고 한다면!? 도대체 내 고민과 문제가 어떻게 나아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하고 다시 점을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 같습니다^^;; 이 괘의 상전은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힌다[自昭明德]"입니다. 명덕은 스스로 내재하고 있는 바름이지요. 동양식 진보가 서양의 그것보다 더 정적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그건 진보가 내면의 덕을 밝히는 것에 천착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이천은 상구효를 풀이하면서 공격해야 할 읍은 다름아닌 자신이라고 해석하지요. 문제 앞에서 더 좋고, 더 옳은 수단과 방법을 찾아 다니는 것과 자신을 살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런 진보 개념은 자신을 점검하고 극복하는 것인 만큼, 어떻게 보면 그저 외부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 무작정 노력하는 것보다 더 고도의 사유능력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빌헬름의 주역 번역을 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 http://www2.unipr.it/~deyoung/I_Ching_Wilhelm_Translation.html

*자로가 강함에 대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방의 강함을 말하는가? 북방의 강함을 말하는가? 아니면 네가 추구해야할 강함을 말하는가? 넉넉하고 부드러움으로 가르치고,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더라도 갚으려 하지 않는 것이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가 거기에 거하느리라. 병기와 갑옷을 깔고서 싸움터에서 장렬히 죽더라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북방의 강함이니, 강한 자가 거기에 거하느니라. 두 가지 상황을 조합하여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가벼이 흐르지 않으니 강하고 굳셈이여!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고 굳셈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지 않을 적의 뜻을 바꾸지 않으니 강하고 굳셈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바꾸질 않으니 강하고 굳셈이여!" [子路問强 子曰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故 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중용> 10장

다음 시간에는

<시몽동, 개체화 이론의 이해> 103~140쪽 읽어옵니다.
<주역>은 명이(明夷)괘, 가인(家人)괘, 규(暌)괘 읽고 공통과제를 써 옵니다.

간식은 영주샘
후기는 정옥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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