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10.4 주역과 글쓰기 3학기 에세이발표후기

작성자
영주림
작성일
2020-10-10 23:31
조회
184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와중에도 주역팀은 애초에 소수정예멤버로 구성된 덕분에 그 흔한 휴강 한 번 없이 무사히 3학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세이 발표도 규문 강좌 중에서 가장 먼저 하게 되었는데요. 추석 주간에 에세이 쓴다고 투덜댔는데 일찍 끝나고 나니 속은 후련합니다. 아, 물론 후련함과 에세이의 퀄러티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요. 대신 주역과 글쓰기의 부캐가 '채운샘 보살 만들기'인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채운 부장님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으며 팀의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만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채운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이른바 “구덩이에 빠진” 주역팀의 에세이 발표현장 함께 하시죠.

3학기는 15번째 괘인 겸괘와 30번째 리괘까지 16개의 괘를 공부했습니다. 이 중 각자 두 개의 괘를 정해서 해석하고, 자신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 이번 에세이 주제였습니다. 사실 3학기부터는 괘사 시험과 함께 괘를 가지고 간단히 글을 써오는 과제를 매주 해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장이라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 할 수 있는데요. 그동안 엉망이지만 매 주 글도 쓰고, 시험도 보고 낭송도 하면서 괘를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배웠던 괘임에도 글을 쓰려고 읽으면 처음 본 것처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애를 먹었습니다. 에세이 발표 당일 와보니 샘들 대부분이 퀭하니 전날 잠을 못 잔 티가 팍팍 나더라고요. 그렇지만 여전히 괘상과 괘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문제를 붙이는 것이 여전히 안 되고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지적을 공통으로 받았습니다.

특히 저는 주역 초심자라는 핑계로 매주 과제도 미완성인 채로 대충해가고 그랬는데요. 그랬더니 역시나 이번 에세이에서도 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로 제출했습니다. 채운샘은 이런 저에게 모른다는 것도 오만, 안다는 것도 오만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이해한 만큼을 쓰고, 자신의 공부 속도만이 있을 뿐이지 몇 년을 공부했고, 주역을 몇 번 읽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혼구녕을 내셨습니다. 야단을 듣고 나니 정신이 확 차려지네요. 솔직히 매번 ‘힘들다, 어렵다, 잘 모르겠다고’고 하면서 대충 읽어보고는 충분히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주역 자체가 워낙에 오래된 텍스트이고, 한자로 쓰여 있다 보니 지금 맥락에서 읽게 되면 무슨 소린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당혹스러움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는 책들 중에 한 번에 술술 이해되는 어디 있었나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것이 구차할 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늘상 말씀하셨고, 전체 에세이의 코멘트에도 해당하는 주역의 괘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봐야 하는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괘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괘의 전체 상이 이해될 때까지 단전, 상전에서 여러 번 주의 깊게 읽으면서 괘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괘의 전반적인 운동성이나 전체적인 맥락에 이해 없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만을 보면, 괘에 대한 해석은 없고 자신의 문제와 논리에 괘를 끼워 맞추려고 하게 됩니다. 급하게 글은 써야 하니 괘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내 문제를 가져와서 그럴듯하게 괘와 이어 붙이려고 하는 글은 우리를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못합니다. 괘에 달라붙어서 괘를 이해하고,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어긋나고 있는지를 보겠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주역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보면 볼수록 자신이 매몰되어 있는 근본적인 지점이 더 잘 보이게 된다고도요. 늘 하셨던 말이지만 또한 그래서 자꾸만 흘려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명심 또 명심해야겠습니다.

어쨌든 주역팀의 샘들은 각자 나름의 고민을 받은 괘로 풀어보려고 했는데요, 그 중에 몇 개 기억나는 것들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불통과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은남샘은 지산겸과 산지박괘를 통해서 반응적인 감정에 얽매이는 문제를 보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괘에 대한 기본적인 형상과 괘에 대한 분석을 충분히 한 후에 자신의 반복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볼 필요가 있다는 코멘트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돌파할 때 머릿속에서 나온 자기 논리가 아니라, 괘사에 따라 이해한 것을 근거로 단순하고 투명하게 글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문제를 차분히 풀어내려 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는데요. 음.... 맞는 말이라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계시는 규창샘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기쁘게 공부하는 지혜를 예괘와 복괘를 통해 보려고 하셨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겪는 변화들을 문제화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글을 쓰셨습니다. 채운샘은 공부가 문제화되는 방식은 64괘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모두 볼 수 있는 것이지 예괘와 복괘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문제화’라는 개념을 우선 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문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는 '예괘를 가지고 공부를 문제화한다면 어떤 방식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괘를 보고 반성하는 글이 아닌 문제화를 하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무엇일지 저도 많이 고민해야 될 부분인 것 같습니다.

후기를 넘 묵혀두어서 주옥같은 코멘트가 많이 생각나진 않지만, 그 중에서 ‘경험을 통해서는 통찰에 이를 수 없다’ 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앎은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고 강렬한 것이라 해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더 큰 경험이 오면 언제든 그것으로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대신 그 경험을 통해서 삶을 통찰할 수 있는 도구로 삼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여러 경험을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지혜가 될 수 없다는 점, 어떻게 보면 그 경험에만 사로잡혀서 세계를 규정하려드는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또 3학기가 끝이 났고요. 다음 주부터 마지막 학기가 시작됩니다. 3학기 내내 헤매면서 허우적 거리는 것 같다가도 이렇게 글을 쓰고 학기를 마무리하고 나면 ‘아 이렇게 하라는 건가.’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오기도 합니다. 4학기는 매주 괘사 시험도 2개에서 3개로 늘고 매주 괘를 가지고 글을 쓰는 과제도 계속할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들뢰즈님의 차이와 반복도 다시 읽어나갈 예정이고요. 게다가 저는 지난 학기에 글을 대충 쓴 벌로 두 페이지를 써오라는 부장님의 특별지시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괘사는 이해가 되지 않겠고, 괘사 시험에서 벌금을 내면서도 다음 주에는 또 하얗게 잊는 것을 반복하겠죠. 그래도 다행히 쫓아 내시진 않으셨으니 이번에는 군말 않고 하려고요. 이번 학기도(?) 종일건건 해보자구요! 다음주에 만나요!

p.s. 후기를 쓸 줄 모르고 현장 사진이 없네요. 아쉬운 마음에 주역점 치는 사진과 시몽동님 세미나 사진 올립니다.

전체 1

  • 2020-10-12 11:27
    경험은 반드시 통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 저도 계속 떠오르는 코멘트입니다ㅠㅠ 경험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구로 삼아 삶을 통찰할 것...이를 위해서는 경험을 자기것으로 환원하지 말아야겠지요.
    영주림샘의 과제가 미니스커트 길이에서 웨딩드레스(!)가 되는 과정을 응원하며^^ 저도 군말 않고 종일건건에 도전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