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4주차(8.15)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8-12 09:13
조회
122
 

지난 주 저희는 인식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참된 세계’가 굳건히 구축되어왔는지, 그리고 그 생겨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환상이 어떤 오류에 기반하고 있었는지 배웠습니다. 즉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빠져 온 오류에 대해 배웠습니다. 도식적으로 요약하면, ‘참된 세계’라는 우리의 사고는 감각을 인식 활동에서 추방함으로써 신체성을 배제했고, 인과율을 잘못 설정함으로써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을 혼동했으며, 대상과 주체를 나눔으로써 행위 혹은 사건으로 일어난 것을 특정한 목적과 의도에 귀속시켰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오류들로부터 그동안 권위를 가져왔던 이성의 비이성성을 밝히면서 참된 세계라는 우상을 무너뜨렸습니다. 물론 참된 세계의 쌍둥이인 가상 세계까지도 함께 말이죠. 우상 파괴 작업의 첫 단계는 인식 활동에서 특권화된 이성, 곧 참된 것만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오래된 사고방식의 해체였습니다.

이번에 타겟이 된 우상은 종교와 도덕입니다. 니체는 모든 도덕과 종교는 “이것과 저것을 행하라, 이것과 저것을 멀리하라”와 같은 정식을 기초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래야하느냐는 질문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에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게 하는 게 우리에게 좋다는 설명입니다. 아니면 처벌(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대답.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믿음을 강요하고, 도덕은 선악의 이름으로 당위를 강요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도덕이 제시하는 가치를 의문을 품지 않고 수용합니다.

질문을 허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상의 중요한 특징이지요. 채운샘은 그냥 그렇게 주어진 것,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한 것인지 모르는 것, 그렇기에 의문의 대상이 되어본 적 없던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구 신성시하는 것도 물론 우상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리에게 문제적인 우상은 우리가 평생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당연함의 영역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 우리 시대의 우상은 무엇인지를 질문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동, 가족, 스펙 등 그 가치가 한 번도 의문에 붙여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니체 시대의 ‘질문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우상은 종교와 도덕이었습니다. 니체는 이성에 대해서 그러했듯 종교와 도덕에 대해서도 그 작동 방식에 전제되어 있는 오류들을 제시합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혼동, 인과관계에 대한 오류 추리 및 편협한 인과의 설정, 주체 개념으로부터 목적, 의도, 의지 등의 가상적 원인을 설정하는 것. 이러한 오류들은 일어난 사건과 나타난 현상을 우리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원인-설명’ 안으로 구겨 넣는 오류입니다. 채운샘은 이것을 삶을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몰이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종교나 도덕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니체는 교회의 처치 방식이 삶에 적대적이고, 도덕의 작동 자체가 반자연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생명을 죽이거나 도덕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도덕은 자연에 부합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아무리 좋은 삶과 사랑과 선과 행복에 대해 말하더라도, 어떤 ‘상태’를 찬양하고 혐오하면서 삶을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에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좋은 것이다’ 혹은 ‘삶은 나쁜 것이다’, ‘어떤 것은 좋다’ 혹은 ‘저것은 나쁘다’라는 가치평가가 실체화되는 이상, 우리가 삶을 좋아하든 나빠하든 그것은 삶에 대해 적대적인 것이며 삶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시작도 끝도, 선도 악도, 이러저러한 규정성도 없는 생성이기 때문입니다. 채운샘은 생성이라는 말을 아름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성의 정의는, 단지 ‘우리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성으로서의 삶에 목적을 부여하고, 삶이 뜻대로 진행되기를 바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삶에 화를 내는 것은 그야말로 삶에 대한 적대고 비방인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평가와 우리가 떠올리는 인과가 삶에 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 그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희는 손쉽게 삶의 긍정이나 삶의 부정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대체 부정은 뭐고 긍정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일까요? 니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삶을 가치평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한다”(110쪽)고 말이죠. 저는 이 말을 그저 우리의 가치판단들이 특정한 삶의 유형(지쳐있거나 건강하거나)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해도, 그 특정한 유형의 삶이 ‘나’에 귀속되는 것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채운샘은 강의에서 ‘나’가 특정 삶의 원인으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의식은 우리의 오랜 언어적 습관 속에서 굳어진 하나의 매개물입니다. 가령 우리는 ‘내가 초콜렛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 충동은 어떤 장기가 보내는 당이 부족하다는 신호가 표현된 것이며 그러한 당 결핍은 이전의 행위들과 신진대사의 방식, 기후 그리고 알 수 없는 기운 장들의 총체적인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또 거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축적된 기억과 또 태어나기 이전에 선조들에 의해 유전자에 새겨진 기억이 함께 작동했을 것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당으로부터 에너지를 합성하는 기관을 진화시킨 수억년 전의 미생물의 무의식 또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몸과 의식은 일종의 수용체 혹은 매개물입니다. 생명의 전체 역사와 우주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복합적인 인과가 특정한 form으로 결정화되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결정화 이전에 진동하고 있는 에너지의 장, 그것이 우리 이전 혹은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나’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나’의 기질이야말로(즉 ‘나’가 삶에 대해 갖는 감성과 가치평가)야 말로 삶이 우리에게 내리는 가치평가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마치 불가청적인 주파수를 수신해 가청적인 소리로 출력하는 라디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럴 때 라디오는 복합적인 주파수 진동을 특정한 음역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그 기기의 수신능력, 즉 징후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이러한 방식으로 결정화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삶의 파장을 다르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다음 주 과제입니다.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194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해옵니다.

주제는 내가 삶 속에서 바꿔내지 못하고 있는 인과(가치, 믿음의 체계)를 발견하고 거기에 내재된 오류의 심리를 밝혀 그것과 대결해보기입니다. 논리적 정답 찾기가 아니라 진솔하게 한 문장 한 문장과 씨름해보기입니다. 공동작업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1

  • 2020-08-12 12:06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한다, 이해했다고 생각한 문장이었는데 생각할수록 심오하네요. 니체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데에 무한한 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무한한 원인들과 더불어 우리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의 실존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가 아님으로 인해 '나'로 존재한다는 것... 이 거대한(?) 사유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