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3학기 5주차(8.2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8-19 20:58
조회
124
지난 주 과제는 자신의 잘못된 인과를 분석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강고한 인과적 해석의 틀을 해부하는 것. 그런데 저는 인과를 해체한다는 것을 조금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원인으로서의 의지와 정신과 주체에 대한 믿음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쓰러뜨립니다. ‘원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믿음,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믿음으로부터 인간은 대상세계를 출현시키고, 인과와 목적과 의도로 가득한 세계를 상상해냅니다. 그러나 이런 영원한 우상을 소환하는 것 자체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원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믿음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그러한 인과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은 아니죠.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에 정념이 발동하여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과를 분석한다는 것은 일종의 수행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약간의 긍정이 엿보이는 결론까지 그럭저럭 도달하는 글을 한 편 쓰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편협한 인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우리의 습관화된 해석의 허술함을 관찰하고 해부하면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부단히 쳐 내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쳐 내는’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이죠. 현대의 인간들은 잘라내는 것으로 가능(완전)해졌어야 했다는 니체의 말이 떠오르네요.

정말이지 ‘쳐내기’가 시급한 시기입니다. 저희 조 토론에서는 ‘도대체 인간은 왜 유튜브(혹은 티비)에 중독되는 것인가!’에 관해, 각자의 아주 개인적이고도 구체적인 경험에 입각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읽은 책에 나오는 한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파병을 나가 있던 군인들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에서는 그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파병을 간 군인들 중 상당수가 헤로인에 손을 댔고 그 중 대부분이 중독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헤로인에 중독된 군인들은 귀국 후 아주 높은 완치율을 보였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정부가 전쟁을 옹호하고 그 피해를 은폐하기 위해 결과를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중독을 유발할 만한 조건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쉽게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중독적인 물질을 규제하거나 중동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을 병자 취급하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에 쉽게 빠지게 되는 조건(구조)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동적인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기쁨을 구성해내지 못할 때 중독에 빠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사실 ‘중독’이란, 어떤 대상 자체에 꽂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조직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태가 드러나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유튜브 중독도 양상은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꼭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업로드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다른 것이 하기 싫고 잠들기엔 뭔가 좀 심심하고 일을 마치고 난 뒤 늘어지고 싶을 때 우리는 유튜브를 찾습니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도 모르고, 언제 어디에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삶이 외부적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놓여있던 군인들이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이 명랑함보다 더 필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일도 들뜸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잘되지 못하는 법이다. 힘의 과다야말로 힘에 대한 증거이다.”(니체, 《우상의 황혼》, 책세상, 73쪽)

인간은 능동성이 아니면 충분히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한다, 라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얼마 만큼이건 조금이라도 더 우리를 기쁘게 하고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는 방향으로 힘을 발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커다란 자극을 주고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더라도 스스로가 원인이 되어 활동하고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쉽게 우울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점이 중독의 역설을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는 ‘자발적으로’ 원해서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쾌락적인 행위 전체를 지배하는 정조는 우울함입니다. 왜냐하면 그 쾌락에는 명랑함과 가벼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골방에 틀어박혀서 흥미로운 영상들을 보더라도, 골방 안에서의 삶이 가져다주는 쾌락이 아무리 커도, 당장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채로 집밖을 나서는 자의 가벼움, 자유로움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것이죠.

어쩌면 공부를 한다는 것, 자신의 익숙한 인과에 대해 계속 질문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명랑함’을 삶의 중심에 놓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가 사실 어떤 보상을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의 습관과 인식의 전제가 문제화되는 불편함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전제를 바꾸는 수행을 계속할 때 우리는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정확히 말하면 더 많은 인과 속에서 이해하게 되고 그럴수록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움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어렵지만 즉각적인 기쁨을. 아무튼, 제가 지난 시간 수업 내용을 정리하며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독 상태에 방치하는 것, 온갖 자극들에 반응하도록 내버려두는 상태의 반대는 금욕이 아니라는 것. 그런 자기방치의 반대는 ‘긍정의 느낌’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조직해가는 것, 진정한 기쁨의 논리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우선 《우상의 황혼》을 끝까지(~207, 〈내가 옛 사람들의 덕을 보고 있는 것〉 + 〈망치가 말한다〉) 읽고,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인지를 써오시면 됩니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는 ~다’라는 식의 앵무새 같은 글 말고, 니체의 사유를 통해 각자 자신에게 익숙했던 자유 개념을 떠나보는 시도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간식은 희진샘가 내영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니체 마이너스 공지도 슬쩍 하겠습니다. 《니체와 철학》을 남은 두 시간에 모두 끝내야 해서 남은 분량의 절반인 297쪽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그래봤자 30페이지 정도 분량이니 꼭 읽고 와주세욥~

 
전체 1

  • 2020-08-22 10:02
    왜 중독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자기방치의 문제 지점이 곧 진정한 기쁨의 논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이르는 후기네요.
    그 어떤 것이 명랑함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수행 자체, 공부 자체는 사실 보상을 담보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와 닿네요. 불편할지도 모르는 그 일을 하고 있음이 곧 자유로움이 된다는 게 어떤 걸지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