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4학기 2주차(10.2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10-20 18:04
조회
138
벌써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시간에는 《이 사람을 보라》 중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과제는 마지막 에세이에서 다룰 책을 선정하고 그 이유를 써오는 것이었는데요, 각자의 문제의식들이 어떻게 또 구체화되고 또 변형되어갈지 궁금합니다. 마지막 학기는 기존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이 될 예정이라서 우선 그에 관련한 공지를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개인작업

마지막 학기에는 《이 사람을 보라》를 4번에 걸쳐 읽고, 그 4주를 포함하여 학기 내내 마지막 에세이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5주간은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와 니체의 다른 저작들을 두루 다시 읽으며 글을 쓰기 위한 재료들을 모으고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5주간은 개요를 쓰고 실제로 에세이를 차근차근 써나가는 시간을 갖습니다. 당장 이번 주에는 각자 선택한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인용문들을 정리하고, 지난 시간 토론 시간에 받은 코멘트를 반영하여 문제의식을 구성하시면 됩니다.
2. 팀 작업

이번 학기에는 개인 에세이 작업 외에도 팀 작업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추첨으로 결정된 조 별로 할당된 니체 개념들을 정리하고 그것을 전체 학인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매주 갖게 됩니다. 어떤 형식으로 팀 작업을 진행하고 또 그것을 발표할 것인지 각 조별로 논의하시면 됩니다.

1조 : 승연샘, 내영샘, 건화/ 데카당, 허무주의, 병과 건강
2조 : 민호, 고은샘, 정아샘, 경희샘/ 힘, 힘의지, 관점주의
3조 : 나영샘, 희진샘, 인영샘, 율샘/ 영원회귀, 자기구원
4조 : 은옥샘, 설샘, 난희샘, 현주샘/ 긍정, 운명애, 디오니소스


* 그래서 이번 주 토요일에 해 와야 할 것은 ① 《이 사람을 보라》중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를 읽고, ② 한 주 간의 개인작업과 팀 작업 결과물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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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개선’ 한다는 따위는 나는 결코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24쪽)
철학이란 무엇일까요? 철학, 적어도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들은 ‘개선’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삶의 개선, 사회의 개선, 인간성의 개선, 관계의 개선 같은 데에는 철학은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무언가를 개선하는 데 무관심하다는 것. 이것을 다르게 말하자면 답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니체를 읽으며 확인한 것처럼 철학은 좀처럼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의 쓸모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개선하지도 답을 주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뭣하러 철학을 공부하는 걸까요?

채운샘은 철학이 어떤 지평 속에서 윤리를 구성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도록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성된 도덕과 절대적 가치와 목적지이자 해답으로서의 이상 같은 것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을 허물어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우상의 잔해들 속에서 스스로 질문을 구성하고 스스로의 윤리를 만들어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유일한 쓸모인 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도 마찬가지. 우리로 하여금 상식적으로 형성해온 세계를 떠나 ‘힘’의 지평에서 윤리를 다시 구축하도록 합니다. 니체의 ‘긍정’은 니힐리즘에 직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니체는 세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덕의 기원은 비도덕적이며 인식의 배후에는 충동과 욕망과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이 세계 속에서 낭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의미한 세계로부터, 니힐리즘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는 윤리를 구성해낼 수 있을까요? 그 출발점은 바로 생성의 무구함에 대한 긍정에 있을 것입니다. 생성변화하는 세계, 늘 운동하고 있는 우리의 신체, 모순과 기만 위에 놓은 우리의 삶. 이것을 생에 대한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조건이자 윤리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지평으로서 끌어안는 것. 어쩌면 니체는 허무주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 무의미한 세계야말로 우리가 해석의 역량을 발휘하고 윤리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유일한 토대(그러나 고정된 토대가 아닌 변화무쌍한 토대)라는 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를 넘어간 허무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철학을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채운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니체는 우리에게 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 자신이 처한 조건 속에서 자기 힘으로 질문을 구성하기 위한 사유의 연장들을 빌려주고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의 사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죠. 이제 남은 한 학기 동안 우리는 어떻게 니체를 따라 우리 자신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에 균열을 내 그 심연으로 내려가 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긍정의 윤리를 구성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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