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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3학기에세이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0-10-15 00:48
조회
229
어제 비기너스 에세이 발표까지 끝내고 나니 훅 늙어버린 것 같습니다. 후기를 써줄 수 있냐는 건화샘의 제안을 순하게 접수하긴 했으나 막상 노트북을 열려니 막막한 겁니다. 추수 후 농기구를 씻어 제자리에 하나씩 갈무리하는 농부의 마음이랄까요. 어지럽게 널린 책과 자료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앉았습니다. 자, 후기까지 써야 이번 시즌을 떠나보내는 거야. 그런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 거지? 발길 가는 대로 규문 홈페이지를 열고 들어갔습니다. 민호샘의 후기를 읽었습니다. 혹여나 시간이 지나면 바랠 새라 그날 채운샘의 귀한 코멘트가 고스란히 복기되어 있더군요. 그날 제가 민호샘 바로 옆자리에 앉았는데 녹음하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찬찬히 메모를 보면서 그 시간을 써 내려 간 민호샘이 선연히 그려집니다. 그냥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썼는데 왜 제게는 민호샘의 마음이 느껴지는 걸까요. 다음으로 나영샘의 후기, 미소가 지어졌어요. 저도 그 자리에서 ‘귀여움’을 발산한 일인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회춘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후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이에요.

제게 이번 시즌 에세이 쓰기는 ‘니체와 함께 에베레스트 올라가기’라 할까요. 3학기 동안 내내 니체의 언어는 갑각류처럼 단단한 제 피부에 부딪쳐 자꾸 튕겨져 나갔어요. 해야 할 과제를 곁눈질하며 BTS에 끌려갔다가 빅뱅에 끌려갔다가...죽어 나간 시간이었습니다. 에세이를 쓸 수 있기나 할까. 정말 막막했습니다. 채운샘의 코멘트를 딸에게 보여줬더니 “와, 정말 신랄한 지적이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이 대단히 크신 것 같습니다...선생님께는 자기 자신이 우상인 것 같습니다.”

자기 우상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방법이 없죠. 저는 쌤의 코멘트를 법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걸 마주하지 않으면 니체고 뭐고 말짱도루묵이다 싶은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보통 과제든 에세이든 마감이 주어진 글을 쓸 때면 머릿속에 일단 틀을 짭니다. 어느 부분에 니체의 어떤 말을 집어넣어 주석자 코스프레를 하고, 뚫고 들어가지 못한 부분은 적당히 물음표로 대체하며 분량을 채우기 위해 뜬검없는 인용문을 집어넣어 나무보살을 죽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죠. 그리고 열린 결말.

이번에는 글이 어디로 나를 데려다 줄지 모르지만 일단 내게 뭐가 문제인지부터 정직하게 까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걸렸어요. 글을 쓰는 동안 문제의식은 끊임없이 숨어버리고 하던 습관대로 공허한 말들이 지면을 채우는 겁니다. 한편의 글은 그 밑에 죽은 말들이 켜켜이 묻힌 무덤 위에 쓰인 것이란 걸 느꼈습니다. 밤을 새고도 (새는 와중에 새벽불공을 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공부를 위해 불공을 정했거든요) 에세이 발표 당일까지 해체 작업이 끝나지 않는 겁니다. 시원하지 않았고 찝찝했습니다. 포기할까. 이 한편의 글이 여기서 흐지부지된다 해서 세상은 털끝 하나 흔들리지 않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펴고 문제의식과 싸웠습니다. 혜화역에 내려 쪼그리고 앉아 마지막 문단을 끝냈습니다. 발표 시간을 한 30여 분 넘겼죠. 내 생애 이번만큼 남김없이 힘을 다 써버린 느낌으로 마친 글은 없었다, 고 글에 썼습니다.

저는 이번에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결한 한 편의 글의 힘이 뭔지를 약간 느낀 것 같습니다. 전에는 아무 문제 없던 것이 문제로 느껴지고, 한편 내 발목을 잡았던 세세한 것들이 툭!하고 떨어져 나가 “너, 이제 공부만 해도 별문제 없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얼음장 같던 니체가 좀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니체는 글 가운데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고 했죠. 그리고 ‘피로 써라’고 해요, 그러면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비유가 아니라 영혼의 세계에 진입할 자격은 오로지 나의 영혼 이외에는 없는 듯합니다. 새끼발가락만큼 그 세계로 나아갔을까요. 하지만 그 기억도 떨어버려야겠지요. 어제 비기너스 에세이 발표에서 한 도반이 공부를 하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저는 ‘겸손’이 ‘누구에 비해 내 것은 초라합니다’, 이런 의미라기보다는, 나아갔다는 기억에 붙들리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혹여 붙들리더라도 “다시 한번!” 미끄러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이 말이 스며듭니다. 아, 고마운 니체!

나의 정원, 황금의 격자 울타리가 있는 정원을 잊지 말라! 정원 같은 사람, 또는 하루가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저녁 무렵 물 위를 흐르는 음악 같은 사람이 그대들의 주위에 있도록 하라. 멋진 고독을,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여전히 잘 사는 권리를 부여하는 자유롭고 변덕스러우며 경쾌한 고독을 선택하라! -선악의 저편, 자유정신 25

 

 

 
전체 3

  • 2020-10-15 23:15
    난희샘, 그날 에세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1호선 전철안에서 우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도반이 전부다!를 비롯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 둘다 무언가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는 사람들처럼 뿌듯했어요. ㅎㅎ
    저도 이번 에세이를 힘들게 썼잖아요. 사실 올해 수업 참석한 날도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에세이라니요, 민망하기도 하지만
    에세이를 마치고 나니 다른 때보다 이번에는 마음이 좀 잘은 모르겠으나 달라진 느낌이예요. 나를 좀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준것같은 느낌이랄까? 좋았어요~
    규문공부가 너무나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가 공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겠지요. 샘 고생많으셨어용~

  • 2020-10-16 12:55
    난희샘의 노고가 뚝뚝 뭍어나는 후기네요. 이제 공부만해도 별 문제없다! 오래오래 같이 공부해요~~!

  • 2020-10-16 21:17
    비기너스 에세이까지 연달아 있었다니 후덜덜. 난희샘 혜화역에서 쪼그리고 앉아 에세이 쓰시는 모습 상상돼요. 노트북 가방은 어데로 갔는지~ 에세이 비하인드 스토리 잘 읽었습니다. 세미나 마지막 학기도 잘 부탁드립니당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