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8월 26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8-21 13:52
조회
86
비가 그쳤더니 이번에는 코로나가 다시 기승이네요. 생각해보면 외부의 문제들은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을 실체화하면서 휩쓸릴 것인지 덜 예속되는 방식으로 겪을 것인지는 공부에 달린 일인 것 같아요. 자유를 위해 꿋꿋하게 세미나를 이어나가죠!

다음 주 공지입니다~ 《맹자》는 〈이루 상·하〉, 들뢰즈는 9장 〈부적합성〉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맹자에서 군주의 권력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주권을 이양됐다고 해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파악했죠. 맹자에게도 군주는 혈통으로 세습되는 존재가 아니라 덕(德)의 발휘로 인정되는 존재입니다. 스피노자와 맹자를 최대한 크로스하면서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갈라지는지 정리해 오시면 됩니다. 어렵지만 재밌네요. ㅎㅎ 간식은 명순쌤, 후기는 경숙쌤께 부탁드릴게요~

 

홉스에 따르면, 개체들은 희소한 자원을 두고 경쟁합니다. 개체들은 스스로 경쟁을 원만하게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국가 같은 중재자를 매개로 해야만 조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개체의 능동성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주권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만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 정치론의 혁명성은 개체가 경쟁하고 대립하는 구도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습니다. 개체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이미 개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개체와 갈등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와 비슷하게 맹자도 개체가 이미 그 자체로 다른 개체와의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게 성선(性善),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다는 이론이죠.

개체에 대한 다른 이해로부터 정치론까지 단번에 끌어낸다는 점에서 맹자와 스피노자의 작업은 많은 점에서 닮았습니다. 물론 《맹자》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처럼 기하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맹자의 성선설이 그 시대에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맹자는 이로움(利)이 아닌 인의(仁義)를 얘기함으로써 당대의 가치구조를 의심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정말 이로운 것이라면, 왜 그것을 추구할수록 백성들은 죽고 천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자기 이로움을 좇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요? 그들이 당연하게 추구하는 이로움은 무엇이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맹자가 ‘인의’, ‘성선설’을 일관되게 얘기한 것은 이로움이 단지 물질의 소유만으로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문제시하지 않는 이상, 이로움에 대해 질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욕망도 그 시대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령, 지금 시대에서 이로움은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죠. 그러나 인류학적으로 살펴보면, 돈을 많이 소유해야만 한다는 관념은 매우 근대적인 사고입니다. 어떤 시대, 사회에서는 상대방에게 베풀 줄 아는 것이 이로움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크로포트킨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개체가 실존하는 원리로 상호부조를 가져오는 것도 개체의 이로움이 물질의 차원으로만 국한되지 않음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맹자가 군주를 포함한 통치자 계층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확실히 다른 학파가 통치자 계층에게 요구하는 것과 구별됩니다. 맹자는 군주가 수신(修身), 탐욕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통치자가 권력을 수단으로 자신의 탐욕을 무분별하게 추구할 때, 구성원들은 자연스레 다른 나라로 도망치기 때문입니다. 한비자는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통치자들이 사욕에 빠지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안에서 개체들 사이의 감화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한비자는 개체들이 서로 갈등하지 않는 사회를 꿈꿨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배제하는 인간이 견고하게 있습니다. 반면에 맹자의 정치는 백성들의 심복(心服), 인화(人和)를 목표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가 정치를 얘기할 때 군사력, 땅 크기가 어떻다는 걸 얘기하기보다 군주와 백성들이 맺고 있는 관계, 백성들이 백성들과 맺고 있는 관계 등을 얘기합니다. 맹자를 읽을 때, 그의 시선이 어디에 가있는지를 꼼꼼히 따지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알게 됐습니다. 특히 군주나 제자들이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 같은 질문, 이론을 맹자가 어떻게 뒤집는지 잘 따라가는 게 중요하더군요. 맹자가 점점 더 문제적인 텍스트로 읽히고 있습니다. ㅎㅎ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사진 업로드는 미룰게요. 허전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루편은 좀 길어요. 책마다 장 구분이 조금씩 달라서 업로드한 파일을 기준으로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니까, 뽑거나 다운을 받아서 바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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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5 12:24
    자신안에 내재한 인의를 확장해 정치까지 나아가는 맹자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타자와 함께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스피노자 모두 개체를 '대립'의 구도로 보고 있지 않다는 부분이 저도 공감되었습니다. 이번 주 글 주제였던 자리이타 自利利他의 자타가 배타적이지 않은 부분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구요.
    맹자와 스피노자를 함께 읽으니, 둘다 다시 정리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빨리 진정되어 스피노자팀이 완전체로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