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8/12) 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20-08-16 13:15
조회
74
날마다 지속되고 있는 ‘현실 정치의 소음’ 속에서도, 절탁S는 맹자와 스피노자를 통해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한껏 실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수신과 정치’, ‘왜 맹자와 같은 유가의 정치는 개인의 수신을 필요로 하는가’를 주제로 토론과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1.

사람이면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맹자는 ‘불인인지심’으로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게 아주 쉬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갑자기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본다면(乍見孺子將入於井)”(공손추 상)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바로 구하러 간다’고 답하면 우리는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의 보편성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맹자는 뒤이어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아이를 구하러 간 이유는 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인가, 사람들의 칭찬을 기대해서인가, 원망을 사기 싫어서인가? 우리는 아마 ‘그런 계산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위 인용문의 “갑자기”라는 부사는 그 일이 ‘문득 닥쳐온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이 위험이나 고통에 처했을 때,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떤 ‘의도’가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 ‘무의지적으로’ 내재해있는 것입니다.

 

맹자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성선(性善)’, 곧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하다는 것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선의 ‘선’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채운 샘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에서의 ‘선’이란 ‘도덕 법칙’을 말한다기보다 어떤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성이란 ‘내가 나이기 이전에 어떤 존재와 연결된 차원, 개체적 차원을 넘어서 하나로 연결된 차원’을 말합니다. 『중용』에서는 ‘선이 계속되는 것’을 ‘성(誠)’이라고 하는데, ‘성’이란 태양이나 달, 천지와 같이 쉬지 않는 우주의 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至誠無息). 맹자는 성선의 근거로 우리에게 내재해있는 ‘인의예지’의 네 가지 단서(四端)를 제시합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仁)의 단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인’(仁)을 ‘어질다’라고 해석하지만, 오늘날의 언어로는 ‘공감, 공명’이 더 ‘인’의 원래 의미에 가깝습니다. 왕양명은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萬物一體之仁) 만물이 가진 ‘생의’(生意)를 말합니다. 우리는 기왓장 깨진 것을 보고도 그것이 ‘훼손됐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스피노자의 ‘관념의 관념’)으로 의(義) 단서이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은 탐욕스럽게 취하지 않는 마음이자 자기의 처지에 맞게 절제하는 능력으로 예(禮)의 단서이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 나아가 때(時)를 읽어내고 때에 맞출 수 있는(時中) 능력으로 지(智)의 단서입니다.

 

인의예지가 사단으로 인간에게 내재해있는 근거는 ‘자연’에 있습니다. 동양의 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윤리를 직접 연결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늘 ‘이 상태가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삶도, 인간의 마음도 특정한 상황이 지속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절망’이란 것도 우리의 오만일 수 있겠습니다. ‘절망’이란 우리가 지금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미래에 투사하고, 현재의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 예단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주가 우리 인간의 예단에 맞춰 돌아갈 리는 없습니다. ‘생성’이란 말도 ‘내 뜻대로 안 된다. 어떤 것도 머물러 있지 않다’는 ‘생멸’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세계는 ‘회복의 힘’이 있으며 그 회복의 힘이 바로 ‘선’입니다. 동양의 철학에서는 어떻게 자연을 모범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 윤리의 중요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면 ‘자기 자정력’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는 “사단을 가지고 있는데도 선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공손추 상)라고 말합니다. 인의예지의 사단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역량’과 유사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어느 순간, 어떤 사건에 부딪쳤을 때 ‘실밥’처럼 나타납니다. 이 순간 이 단서, 즉 ‘우리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존재의 보편적 연결성’을 못 본척하거나 놓치지 말고, 그것을 붙잡아 존재 전반의 지평으로 확충해 나가는 것(擴而充之)이 맹자의 ‘수신’입니다. 하지만 ‘확이충지’의 수신은 우리의 ‘사’(私), 즉 ‘사사로운 기질’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性)은 다 같지만, 그것이 펼쳐질 때의 기질은 다릅니다. 기질이 탁한 사람은 그 본성이 기질에 의해 가려지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유가의 수신은 무사공평(無私公平), 곧 사적인 것을 최소화하고 공적인 것을 확장하는 것, 편협한 자기애를 벗어나 존재의 근본적인 차원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천지의 운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본성을 회복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역량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펼치면 되는 것입니다.

 

고대 철학에서 포이에시스(poiesis)는 질료에 힘을 가해 그것을 변형하는 ‘제작’을 의미하는 개념인 반면, 프락시스(praxis)는 그 제작의 과정에서 ‘자기를 변형’하는 것까지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자기 변형’과 ‘관계의 변형’은 동시적입니다. 자기의 변형은 관계를 변형하며 관계의 변형은 자기를 변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신은 ‘자기 변형’이며, 유가의 ‘군자’는 ‘자기변형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성과 정을 다스립니다(心統性情). 여기서 정(情)이란 정서를 포함해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發) 마음을 가리킵니다. 심의 본성적 차원을 확충할 것인가 아니면 정에 이끌릴 것인가? 이것이 맹자의 윤리적 문제가 놓여 있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게 됩니다. 평소에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사사로운 욕심에 흔들리며, 두려움으로 미망을 만들어내면서 안절부절, 우왕좌왕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군자는 수신의 과정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핵심을 통찰하여 늘 자신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며(守約) 스스로 사사로움이 있는지 없는지 돌아보아 올바른 일을 행하려는(自反而縮)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일상적으로 역량을 사유하는 방식은 상대적입니다. 우리는 항상 역량을 다른 누군가의 역량 또는 어떤 결과와 비교합니다. 비교는 척도를 전제로 하며, 그 척도는 가장 이상적인 것, 가장 탁월한 것, 또는 ‘원하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량은 실존 그 자체와 분리되어 사유될 수 없는 것으로, 비교의 차원이 아닙니다. 싹(결과)이 난 것만 역량이 아니라 싹이 나지 않은 것도 역량인 것입니다. 조건이 작용하는 방식이 서로 달랐을 뿐입니다. 역량의 상대적 비교는 존재 간에 위계를 만들어내며, 위계의 세계에서 ‘자기 해방’은 불가능합니다. 유한한 개체와 위계를 달리하는 무한한 것, 절대자를 전제하면 우리는 현실 속에 결핍을 도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해방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전체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해방에 이를 수 있을까요? 무한한 완전함이나 탁월함, 유비와 같은 개념은 ‘내재론’적으로 신과 양태를 사유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양태의 역량 구성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데카르트와 비교한 스피노자의 독특함은 ‘존재의 일의성과 역량’, 곧 신과 양태 사이의 위계를 지우는 것에 있습니다. 위계가 없는 내재론적 세계라면, ‘나의 해방’은 ‘전체’와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해집니다. ‘나의 해방’은 전체를 통찰하고 내가 전체와 분리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예속상태’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현실적 차원에서 존재 해방을 위한 역량을 구성해낼 것인가’ 하는 실천적 지평의 문제만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실천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변형’, 자기를 구성해내는 과정입니다.

 

들뢰즈의 문제의식은 지상의 세계,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세계’, 결과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그 세계를 그렇게 나타나게 하는 ‘원인’과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 입니다. 구조주의는 현상학이나 맑시즘과 같은 주체철학의 선험적 주체를 비판합니다. 주체철학에서 주체는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와 의식적 각성에 의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바꾸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구조주의에 따르면 주체는 선험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산물, 관계들의 위치, 관계의 효과이자 생산물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주체는 그냥 사라지면 되는 것일까요? 구조주의는 선험적 주체가 허구임을 증명하기는 했으나 구조 자체의 변환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구조주의에는 ‘역사성’이 없습니다.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은 이에 대한 비판의 한 흐름입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사유되어야 하며, 진리도 어떤 진리 값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될 뿐임을 보여줍니다. 권력, 지식, 주체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적 측면을 봐야 합니다. 이에 따르면 결과로서의 나는 나를 만들어 내는 원인에 참가하고 있으며, 나를 만들어낸 원인은 내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우리를 생산하지만 우리가 권력을 생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도 권력이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어떤 품행에 인도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푸코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들뢰즈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부분들의 작동이 전체를 변화해 나가는 ‘욕망과 기계’로서 사회를 보자고 합니다. 들뢰즈의 사회기계는 유기체가 아닙니다. 유기체주의에서 부분은 전체의 1/N로서 항상 자기 위치에서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전체를 재생산하지만, 사회기계에서 부분은 언제나 전체 안에 있는 부분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초과합니다. 그 결과 작동이나 생성은 원상태 그대로를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들뢰즈가 보려는 것은 부분적인 것들의 작동이 어떻게 끊임없이 전체를 변환하면서 이루어지는가, 또한 자기 기능을 늘 초과하면서 만들어지는 부분이 어떻게 전체 기계에 다시 흡수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부단히 탈영토화, 재영토화, 탈코드화, 재코드화하면서 오차와 정지와 고장을 만들어내며 작동하는 기계로서 사회를 바라보자고 제안합니다.

 

『천개의 고원』에서 욕망과 기계는 ‘배치’(agencement, arrangement)로 통합됩니다. 배치란 어떤 요소들의 배열에 의해 생산되는 전체, ‘다양체’(multiplicity)를 의미합니다. 접히고 펼쳐지는, 힘을 받고 힘을 펼치는 ‘동시 운동’ 속의 일시적 상태가 ‘배치’입니다.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자기 욕망의 배치를 바꾼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나의 욕망을 바꾸려면 나를 바꾸는 ‘힘 관계’가 필요한데, 나의 욕망을 바꾸는 것이 또한 힘 관계를 바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의 욕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바꾸려고 생각하면 우리는 비관과 낙관을 오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변형을 통한 타자 변형, 또한 그 타자의 변형을 통한 자기 변형의 역량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끊임없는 도주’를 어떻게 역량화하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연대할 것인가가 들뢰즈의 문제의식입니다. 이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존재의 일의성’입니다. 그래야 나 자신의 변용이 전체 변용의 전제이자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에 종속되어버립니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사건)’란 사물을 지시하는 이름이 아니라, 부정법(to) 동사의 차원, 부단한 생성의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나무가 푸르다’라고 할 때 ‘푸르다’는 것은 상태의 이름에 불과한데, 이 ‘푸름’ 속에는 ‘푸르러짐’이 내속되어(insist)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결과로서의 ‘푸름’만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 ‘푸르러짐’은 지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생성(소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푸르러짐’은 ‘붉어짐’이나 ‘누렇게 됨’과 같은 또 다른 생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나무에는 끊임없는 ‘~해짐’, ‘되기’가 내속되어 있습니다. 부정법 동사의 차원인 ‘~해짐’은 의미가 발생하는 차원입니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파동과 입자’를 설명하는 것처럼, 관찰자가 ‘나무가 푸르다’라고 하는 순간 하나의 의미가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채운 샘의 해석에 따르면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실체-속성-양태’를 ‘생성(원인)의 차원-내속하는 차원-드러나는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체는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속성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화됩니다. 또한 스피노자와 들뢰즈를 유식불교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분별과 집착)-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겨남)-원성실성(圓成實性, 그 자체 자성이 없는 무분별의 세계, 무한연쇄의 우주)’과도 비교해 주셨습니다. 어떤 자성도 없는 세계가 마치 자성이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원리가 ‘상호의존’입니다. 어떤 것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규정을 만들어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을 ‘실제’라고, 자기가 규정한 것에 불과한 것을 자기가 규정한 대로 실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있다고 알고 있는 이 세계’가 ‘상호의존(의타기성)적으로만 나타나는 세계’임을 아는 것이 공(空)과 연기(緣起)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도(道)와 음양(陰陽)’의 세계도 이와 같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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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6 21:29
    와.... 강의가 통째로 정리됐네요. 덕분에 놓쳤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네요. ㅋㅋㅋ;; 결국 스피노자나 맹자에서 돌파해야 하는 것은 '있다'에서 출발하는 사고방식인 것 같습니다. 넘어가기 어려운 사고지만, 그래도 조금씩 배우면서 아~~주 조금씩 만큼은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 그런 건 아니고 선생님들과 같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감동을 풀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