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 사라시나 이사오

태풍이란 그저 공기의 움직임일 뿐이다. 그러나 태풍은 생물과 상당히 유사하다. (…) 태풍이든 초기 생물이든 주변에서 에너지나 물질을 계속 흡수해서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고 자손을 낳으며, 에너지나 물질을 흡수하지 못하게 되면 파괴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유사하다. (…) 태풍은 어떻게 생겨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처음에는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다 보니 바닷물 위의 수증기도 자연히 늘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생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생리현상들이 중복된 결과 태풍은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살게 된 것이다. 우연히 에너지를 흡수하는 동안 일정한 형태를 만들고 때때로 같은 것을 복제하게 되었을 뿐이다.
생물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막에 둘러싸인 구조의 유기물이 생겨났고, 어쩌다 보니 그것이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에너지를 흡수하는 동안 일정한 형태를 만들었고, 때때로 같은 것을 복제하게 되었을 것이다. 붕명 아주 오래 전 지구에서는 ‘복제하는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 비평형 상태에서 나타나는 거시적 구조]가 많이 탄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막에 둘러싸여 우연히 오래 사라지지 않는, ‘복제하는 산일구조’가 생겼다. 그리고 약 40억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살고 있다. 그것이 현재 지구의 생물이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목적이나 살아가는 의미를 따지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 있는 구조가 된 결과로  태어난 것이 생물이라면, 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있어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즉 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생물이 아닐까? 우리는 하루하루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꿈을 좇거나 타인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가능하다면 그런 생산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긍정적으로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때는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에 생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생물을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므로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 그런 생물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잔혹한 진화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