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신영복

글씨를 조용히 평정한 마음으로 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제 경우는 굉장히 바쁘고 긴장됩니다. 쓰면서 하나하나의 획을 보랴, 옆의 글자 보랴, 이 줄 보랴, 저 줄 보랴, 여기 쓰면서 저 위의 것 보랴 여간 긴장되고 바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흑과 백의 조화도 봐야 되거든요. 글씨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어느 정도 크기의 종이에 어느 정도의 먹이 들어갔는가, 그리고 여백과 글씨의 관계는 어떤가, 이러한 것이 서도(書道)에서 가장 중요하거든요. 저는 글씨를 쓸 때 까만 것을 보기보다는 하얀 것이 얼마나 남았나를 보면서 써요. 까만 것은 숙달되면 붓을 자기 마음대로 운필이 가능하니까 안 봐도 돼요. 하얀 것만 보고 써요. 한 자 한 자의 개별적인 것을 단위로 하여 쓴다기보다 줄곧 다른 것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쓰는 셈이지요. (…) 글씨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 자 한 자가 반듯하고 질서정연하게 써 내려간 것이 아주 보기 좋다고 하지요. (…) 또박또박 옆 글자에게 신세질 것도 신세 받을 것도 하나 없이 한 자 한 자가 독립해 있는, 그래서 ‘시민적 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는 글씨를 잘 쓴 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글씨로 치지 않습니다. 사자관(寫字官) 글씨라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베끼는 글씨지요. 서도의 높은 경지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파격인데도 멋지게 살려 내고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겁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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