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16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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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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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주에는 제2장 10,11,12 서열, 권력의지와 권력감정, 힘들의 반응적 생성에 대하여 읽고 토론했다. 앞서 서열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힘들이 가지는 양적 차이와 그에 따라 성질이 부여된 힘들-적극적 힘들과 반응적 힘들-의 차이’로 설명되었다(p88).  니체에게 서열은 적극적인 힘들의 반응적 힘들에 대한 우월성을 의미한다. 적극적 힘들은 <서열 속에서 불변의 내재적 지위>를 갖는다.  니체는 자유로운 사유자들이 가지는 서열과 자유로운 정신이 가지는 서열을 대립시킨다. 자유로운 정신은 서열 그 자체를 문제 삼지만, 실증주의, 인본주의, 변증법과 같은 인간적 사실과 반응적 힘들에게 봉사하는 ‘자유로운 사유자’들에게 서열은 반응적 힘들이 승리한 장소이다. 자유로운 사유자들에 대해서 주어진 사실에 대해서 해석하지 않는 무능한 자이자 그 내용이 갖는 본성 즉 인간적 힘들의 성질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는 “사실숙명주의자”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법과 도덕, 종교를 가지고 마땅한 서열을 배운다.


 니체에게 자유로운 정신은 힘들의 기원과 성질의 관점에서 그 힘들을 판단하는 해석하는 정신이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해석만이 존재한다>. 니체에게 강함과 약함은 절대적인 힘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실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의 투쟁의 결과와 성공을 기준으로 강함과 약함을 판단할 수 없다. 상대적인 약한 힘을 가진 자도 “그가 끝까지 간다면” 강자만큼 강하다. 힘들의 규정은 적극적 힘과 반응적 힘들의 특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반응적 힘은 ① 적응, 제한, 실리를 목적으로 하는 힘, ②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고 부인하는 힘, ③ 자신을 부인하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힘이다. 동시에 적극적 힘은 ① 조형적이고 지배적이고 굴복시키는 힘, ②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힘, ③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고, 그것을 향유와 긍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다. 이런 힘의 특징을 동시에 고려할 때 힘들의 우위가 규정된다.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힘’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의견을 나눴는데, 자신의 능동성을 발휘해서 능력의 한게치까지 이르는 것이며, 결국에는 한계치에서 얼마만큼 변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하고 이야기되었다.


 권력의지는 힘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양적 차이를 생산하는 미분적 요소이다. 힘들의 관계는 다른 힘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한에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권력의지는 힘 그 자체 속에서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으로 드러나게 된다. 권력의지는 힘들의 생성, 생산의 관점에서 힘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표명의 관점에서 관계 속의 힘들에 의해서 규정된다. 힘이 더 강할수록 더 다양하게 더 많이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니체에게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은 감정과 감성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권력의지는 모든 다른 감정들이 파생하는 <원시적 정서 상태>이자, 힘의 정서(파토스)로 설명된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의지는 힘의 감성으로 표명된다(p123)“ 그래서 어떤 힘(affection:끌림)은 복종하게 하거나 스스로 복종함으로서 힘들을 적극적으로 해체, 분열, 분리시키기도 하고, 해체, 분열, 분리되기도 한다. 분명한 점은 영향받는 능력, 권력의지는 상응하는 힘들 자체가 매순간 어떤 감각적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충족되고 실현된다는 점이다.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은 힘들의 생성 속에서 ① 적극적 힘, 영향을 끼치거나 명령하는 능력 ② 반응적 힘, 복종하거나 영향을 받을 능력 ③ 발전된 반응적 힘, 분열시키고, 분할시키고, 분리시키는 능력 ④ 반응적으로 되는 적극적 힘, 분리되고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세미나 중에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은 근본적으로 신체적 한계에 따른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인간과 진드기가 감각하는 대상과 세계가 서로 다르듯이, 권력의지는 신체적인 조건하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대상을 선택하는 무의식적이자 정서적인 끌림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이야기되었다.


 힘의 반응적 생성이란,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킬 때, 적극적 힘이 반응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반응적 생성은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같은 허무주의의 형태로 도처에서 확인된다. 그러면 반응적 힘은 어떻게 승리하는 것일까? “부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의지의 한 성질이고, 바로 그것이 권력의지를 허무주의 혹은 무의 의지로 규정짓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힘들의 반응적 생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반응적 힘들이 승리하기 때문에 적극적 힘이 반응적이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그것들이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면서 그것을 그것들 자체보다 더 심오한 반응적 생성으로서의 무의 의지에 인도하기 때문에 승리한다".


 들뢰즈는 “우리는 반응적 생성 이외의 다른 생성은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다(p126)”고 단언한다. 이것에 대해서 아마도 우리가 감각과 언어를 가지고 사유하는 과정, 인간의 신체가 맺는 외부 힘들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이야기 되었다. 들뢰즈는 원한, 가책, 허무주의를 가져오는 반응적 생성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원리라고도 한다. 니체는 반응적 생성 외에 다른 감성, 다른 힘들의 생성에는 ‘느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회귀 자체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인간의 <큰 경멸>과 <큰 혐오>의 정서가 될 뿐인 것이다.


 원한, 가책, 허무주의로 되돌아오는 반응적인 생성은 ‘영원회귀’의 사유를 하잘것없고 보잘것없는 반응적 인간의 피곤한 영원회귀로 만들 뿐 아니라, 영원회귀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을 심는다. 그 모순은 <어떻게 생성의 존재인 영원회귀가 허무주의적 생성을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가?>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꼬리를 스스로 삼키고 있는 뱀의 목을 자르듯이 반응적인 생성의 영원한 반복의 똬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부정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긍정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2월 1일에는 2장의 13,14,15까지 읽고 마무리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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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2 16:28
    권력의지를 영향 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때, 그 능력이 가장 능동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다는 경우, 적극적인 힘이 되는 경우는 무엇일까요? 이번 주에 저희가 머리 모아 토론한 것처럼 아마도 부정의 능력인 것 같아요. 부정.... 그러니까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고 그것들과 겨루고 전유하는 '창조를 위한 파괴' 혹은 '수확을 위한 밭갈기'로서의 부정이 필요한 것 같네요. @-@ 어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