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17주차(2.1) 후기

작성자
NY
작성일
2020-02-08 07:25
조회
207
13. 의미와 가치들의 양면성

들뢰즈는 힘들의 적극적 생성과 ‘반응적’ 힘들의 적극적 생성이 니체의 힘 이론으로 체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니체가 ‘적극적 힘’을 말할 때에 ‘그것은 그 결과의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며 혹, ‘반응적 힘이 적극성을 띄는 경우는 어떨까?’ 질문을 던진다. 만약 ‘적극적 힘’이 반응적 힘에 의해 분리되어 반응적 힘이 된다면 그것은 적극성을 잃게 되는가? 끝까지 나아갈 수 없는가?? 반대로 ‘반응적 힘’은 그 자체로 적극적이 되지 못하는가? 반응적 힘이 적극적이 되는 것,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간다는 것. 들뢰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적극적이 되는 저속함과 천박함, 어리석음 등은 없는지를 묻는다,

들뢰즈는 반응적 힘에 대한 상이한 관점을 ‘질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찾는다. 우리는 질병에 걸렸을 때 쉽게 우리 자신(신체)을 의료권력에 내맡긴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축소시키고, 적응하는 것 외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강제한다. 환자의 관점에서 깨닫게 되는 보다 건전한 가치들이 있음에도 현대의 우리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반응적’이 된다. 니체는 그러한 반응적 힘들의 특징에서 자못 염려스러운 권력의지, 우리를 우리의 권력에서 분리시키는 동시에 우리에게 다른 권력을 쥐어 주는 위험하고 흥미로운 방식의 ‘반응적 생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이 경탄할만하다고 말한다. 병든 인간뿐 아니라 종교적 인간에게서도 그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고, <도덕의 계보학>에서는 위험한 현존의 형태인 성직자의 현존을 예로 언급하면서 위와 같은 반응적 힘들의 이중적인 측면,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사유를 좀 더 확장한다.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는 것’과 ‘내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같은 힘인가?’를 묻는다. 어린 양에 비유되는 ‘신도들의 종교’와 새로운 형태의 맹금에 비유되는 사제들의 종교가 같은 종교인가?를 묻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반응적 힘들은 같은 힘들이 아니며 그것들의 무의 의지와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라 몇 가지의 변화된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① ‘복종하는 동시에 저항하는’ 반응적 힘. ②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는’ 반응적 힘. ③ 적극적 힘을 ‘감염시키고’ 그것을 ‘무의 의지 속에서 반응적 생성의 끝까지 끌고 가는’ 반응적 힘.
④ 적극적이었으나 ‘자신의 가능성에서 분리’되고, 심연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서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반응적이 되는’ 반응적 힘.

들뢰즈는 위 반응적 특징들을 해석하는데 계보학이 필요하며 ‘부정’, ‘무의 의지(허무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들의 발전 정도를 해석하는 ‘반응적 힘’들의 문제가 ‘적극적 힘’의 편에서도 ‘작용’과 ‘긍정’ 사이의 관계의 발전 정도를 해석하는 문제로써 제기된다고 말한다. ① 부정 자체의 관점에서 긍정 자체를, ② 긍정의 관점에서 부정을 판단하는 것을, ③ 허무주의적 의지의 관점에서 긍정적 의지를, ④ 긍정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허무주의적인 의지를 판단하는 것을 계보학적으로 따져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의미와 가치들의 양면성이 어떠하건, 반응적 힘이 끝까지 가기 때문에 적극적이 된다고 결론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반응적 힘의 생성이 최종 결과를 전개할 때 동력이 되는 것은 부정과 무의 의지와 관계이고, 그와 반대로 적극적 생성은 작용과 긍정의 유사성을 가정한다. 때문에 들뢰즈는 적극적 생성을 위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14. 영원 회귀의 두 번째 측면 : 윤리적이고 선택적인 사유로서

선택이란 힘의 ‘활동성’과 의지 속의 ‘긍정’이라는 이중적이고 동시적인 선택을 말한다. (반응적 생성은 선택의 산물로서 사유된다.) 그 선택의 원리 중심에는 ‘영원회귀’가 있다. 들뢰즈는 영원회귀가 선택적인 이유가 사유로서 의지에게 실천적 규칙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니체의 말을 빌어 <의욕하는 것을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이 무한히 그것을 하길 원한다면> 게으름이나 어리석음, 저속함, 비굴함, 악의, 그것들은 더 이상 동일한 것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선택하는 것은 자기식으로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도록 하며 허무주의적 ‘의지’속에서 강력한 동력을 발견하는 반응적 힘들은 최초의 첫 번째 선택에 저항한다. 두 번째 선택은 첫 번째 선택과는 아주 다르다. 들뢰즈는 ‘영원회귀’를 니체적 테마로 설명한다.

①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 ‘영원회귀’, 영원회귀만이 허무주의의 의지를 완전하고 전적인 의지로 만든다.
②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의 의지는 적극적 힘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등 돌리게 만드는 반응적 힘들의 형태다. 그러나 반응적 힘은 동시에 반응적 힘들의 보존, 승리. 전염에 최선을 다한다. 무에 의지는 보편적 반응적 생성이며, 힘들의 반응적 생성이다. 바로 그 점이 허무주의의 ‘불완전함’을 알려 준다. 금욕적 이상을 실천하는 것 역시도 니체는 그것이 삶을 보존하는 기술이며 ‘미봉책’이라고 말한다. 나약하고 쇠약해진 반응적 삶의 보존 원리이며, 삶의 비하, 삶의 부정은 그러한 원리들을 통해 반응적 삶이 보존되고, 생존하고, 승리하고, 전염성 있게 되는 그러한 원리를 형성, 유지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③ 무의 의지가 의욕(=창조)될 때 반응적 힘은 허무주의를 ‘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부정을 반응적 힘들 자체의 부정으로 만들기에 이후의 영원회귀는 약자들의 파괴, 자멸로서 표현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문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몰락을 원하는 자>의 찬가를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파멸을 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보존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저없이 다리를 건널 것이기 때문이다.>
④ 반응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등 돌리는 것과 자기 파괴, 자멸하기를 원하는 것은 다르다. 반작용의 과정인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 속에는 적극적 힘이 반응적이 된다. 자멸 속에서는 반응적 힘들 자체가 부인되고 무화된다. 때문에 자멸은 소위 적극적 활동, 적극적 파괴이다. 이것은 강한 정신들이 몰락에의 의욕을 각오하면서 반응적인 것을 영원회귀에 종속시키는 형태로, 반응적인 것을 자신 속에서 파괴하는 의지들이다.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며, ‘전환’이 일어난다.
⑤ 영원회귀는 본성의 변화(전환) 없이는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존재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때문에 선택의 문제는 더 이상 선택적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적 존재, 존재가 선택이라는 문제로 거듭난다.  영원회귀는 존재이고, 존재는 선택이다.

 

15. 영원회귀의 문제

들뢰즈는 ‘영원회귀’의 문제가 권력의지의 두 성질인 ‘긍정’과 ‘부정’의 관계,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의 관계, 새로운 감각, 사유, 존재(초인) 방식으로서의 전환의 가능성들과 관련해서 단순하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니체 용어 속에서의 ‘가치들의 전복’은 적극적인 것, 긍정을 의미하며 또한 긍정의 힘으로 변화된 부정, 디오니소스적 변신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로 ‘적극적인 생성’과 ‘반응적 생성’, 그리고 ‘반응적 힘들의 적극적인 생성’과 ‘적극적 힘들의 반응적 생성’의 이중적 생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중 적극적 생성만이 ‘존재’를 갖으며 생성의 존재가 반응적 생성, 즉 허무주의적 생성의 형태를 띄면 ‘긍정’은 모순적이 된다.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반응적 생성은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가르친다. 적극적 생성의 현존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생성의 존재를 ‘충분히’ 긍정할 수 없다. 또, 보편적 존재의 생성은 단 한 순간에 긍정하는 ‘적극적인 생성’만이 우리에게 하나의 존재를 갖게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람들이 생성의 보편적 존재로서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한, 나아가 영원회귀의 징후와 산물로서 ‘적극적 생성’을 긍정하는 한, ‘긍정’은 점점 뉘앙스가 변화되고 더 심오해진다.

물리적 이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보편적 생성의 존재를 긍정한다. 그러나 선택적 존재(인간)는 생성의 존재를 적극적 생성에 의해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서 긍정한다. 긍정의 완벽한 형태는 전체를 긍정하는 것이며 보편적 존재는 단 하나의 생성으로 한 순간에 모두 긍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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